[마가복음] 마가복음 13장 예수님의 마지막 때

성경/마가복음|2024. 9. 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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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번기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총 16장까지 구성돼 있는데 우리가 오늘 나눌 내용은 12장의 마지막 부분과 13장입니다.

 

마가복음의 총 1장-10장까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고

지난 주 공부했던 11장-16장까지는 무슨 내용이 나오냐면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1-10장까지는 3년반동안 있었던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이고 11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단 일주일에서 열흘정도의 일을 6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왜 3년반동안의 이야기는 10장에 압축해 놓고 일주일 남짓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성경 6장에 이렇게 늘여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끝이 가까울수록 사건 전개가 어떻게 되나요? 네 느려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것에 집중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절: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막13:26-27)

 

<학습 목표 읽기>

 

느끼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지 않고 시험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인도하신다? 성령께서 인도하신다. 

 

‘행하기’에서 말하듯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을 끄고 자고 있는데 누군가 불을 켜며 깨울 때 자고 있던 내 시야에 빛이 들어올 때 갑자기 너무 빛이 밝아서 그것을 쳐다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영적 시각이 잠들어있으면 아무리 마지막 때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어도 예언이 성취되고 있어도 절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깨어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Q.  <도입질문> 사소한 행동이라고 보았던 것이 큰 결과를 낳은 것을 경험해 봤습니까?

<해외에서 축구 하고 있던 선수를 인터뷰 하는게 목표 – 스포츠 에이전시 – 사업도 살짝 같이 – 독일도 다녀오고>

 

일 주께 드린 적은 동전 두 개

<막 12장 41-44절 읽기>

두 렙돈이면 지금으로 치면 얼마정도입니까? 

 

우선, 당시 이스라엘의 화폐에는 달란트, 므나, 드라크마, 데나리온, 앗사리온, 고드란트 등이 있는데 ‘렙돈’이라는 동전은 화폐단위에 끼기에도 낮은 그냥 ‘푼돈으로 사용했던 동전’ 정도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1렙돈의 가치가 그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1/64의 가치였다고 합니다. 검색해보니까 대략 현재 최저시급 기준 8시간 근로한다고 계산을 해보니 2,500원정도 였습니다.

 

Q. 자, 그럼 다른 사람들은 훨씬 많은 헌금을 드렸을텐데 어떻게 이 가난한 과부의 2,500원 정도의 헌금이 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이 다른 모든 사람의 헌금보다 더 크다고 선언하셨는가?

 

우리가 읽었던 마가복음을 제가 다시한번 보니까 가난한이라는 단어가 2번, 구차한이라는 단어가 1번 나옵니다. 총 4절의 성경절인데, 마가는 이 과부가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정말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가난한’ 이라는 단어의 원어가 휘스테레세오스라는 단어인데 이 의미는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필요 조차 채우지 못하는 극도의 가난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생각해볼 때, 그녀에게 이 헌금은 정말정말 큰 금액이었을 것이고 큰 희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지도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많은 헌금을 드렸어도 그들에게 큰 타격도 없었을 것이고 희생도 없었고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당장 내가 지금 먹지 못해도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마음인 자기희생적 태도로 헌금을 드렸고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에 이것을 드려도 당장은 먹고살기 어렵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헌금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을 때 자신의 생활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하나님께서 날 먹이신다는 믿음을 갖고 헌금을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헌금을 크다고 선언하신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부자들의 헌금은 자기희생과 믿음이 아닌 자기영광을 위한 헌금이었던 것입니다. 나 얼마냈어! 이렇게요. 

 

하나님께서는 헌물을 드리는 동기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요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라고 그녀의 헌금의 가치를 사람들이 보는 관점 우리가 보는 관점과 다르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혹시,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부은 여인의 이야기를 모두 아시죠? 네. 그때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칭찬해주시면서 뭐라고 말씀해주시냐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내려오고 있습니까? 네 우리에게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자 다시 그 가난한 과부에게로 돌아가봅시다. 그 가난한 과부가 그 가난 중에 드렸던 헌금의 이야기를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듣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녀의 믿음에 감동해 헌금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내다보시고 그 여인이 다른 사람보다 헌금을 많이 넣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류대균 교과 말씀

 

Q.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헌금드리는 마음을 칭찬하셨지만 과연, 그 돈이 하나님의 사업에 바르게 사용된다고 볼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만나시기 하루전에 무슨일이 있었냐면 성전 정결 예식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모습이 어땠습니까? 장사의 소굴이었습니다. 이 여인도 분명, 자신이 헌금을 드렸을 때 지도자들이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그것을 알고도 헌금을 드렸던 것입니다.

 

Q. 오늘날, 우리가 드려지는 헌금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 행정 절차에 맞게 쓰여집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그 헌금이 우리가 느낄 때 올바로 사용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헌금을 드려야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시대의 소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은 과부의 예물을 강요하여 악용한 이기심을 책망하셨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창고에 그의 예물을 가져온 과부를 칭찬하셨다. 사람이 예물을 악용한다고 하여 그 바친 자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 (소망,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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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1-12장 논쟁

성경/마가복음|2024. 9. 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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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은 마가복음 11-12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의 제목에서 나왔듯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있고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 성전 정결, 예수님의 권위에 관한 논쟁, 예수님의 비유, 재림과 종말에 대한 예언 등이 나옵니다.

 

오늘의 제목이 논쟁인데, 

마가복음에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공부했던 지난 3과에서 공부했던 막2-3장에 5가지 논쟁이 있는데

죄 사함에 대한 논쟁

죄인과 함께 하심에 대한 논쟁

금식에 대한 논쟁

안식일 논쟁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에 대한 논쟁

 

우리가 오늘 배우는 9과에서는 논쟁을 약 6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

악한 농부에 대한 비유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해

결혼과 부활에 대해

큰 계명

헌금

 

또 우리가 짚어야 하는 부분은 예수님의 사역지의 변화입니다. 지난 마가복음 10장부터 예수님의 사역지가 이제는 갈릴리근방에서 큰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전환 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당신의 고난 및 사명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또 마가복음이 마가에 쓰여진 것이기에 우리는 마가가 이 마가복음을 읽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역과 지상생애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마가복음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주신 후 이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을 잘 보았습니다. 이것을 메시야 비밀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존재를 감추려고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시는 것입니다.

 

<학습목표 읽기>

 

Q. 나를 힘들게 했던 편견이 있다면 나눠볼까요? 어떻게 극복했는가?

 

일 승리의 입성

 

<막 11장 7절 읽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야 하는데 말이 아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을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참 모양빠지는 입성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시대의 소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500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왕의 오심을 예언했다. 이 예언은 이제 성취될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왕의 영광을 거절하신 이가 이제 다윗의 보좌의 약속된 후계자로서 예루살렘에 임 하신다"

 

<영상 시청>

 

예수님의 입성에 도성 전체가 들썩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군중이 "호산나"를 외쳤는데 원래 의미가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나귀새끼를 타셨을까요?

 

<일요일 영감의 교훈 읽기>

 

<슥9:9 읽기>

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500년 전에 한 선지자가 예언을 했습니다. 왕이 임할 것인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타냐고까지 했냐면 나귀가 아니라 나귀의 새끼라고 했습니다. 참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예언입니다. 예언 그대로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 9:9의 예언의 성취였고 예수님께서겸손하신 왕, 공의로운 구주이심을 상징합니다.

 

또 공개적으로 입성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진정한 구주이자 왕이심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군중들은 호산나 외치면서 그분을 저희의 메시야로서 환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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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6장] 하나님의 아들 예수 (폭풍을 잠잠하게 하심, 거라사 광인, 야이로, 혈루증 여인)

성경/마가복음|2024. 8. 1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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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과 갈릴리의 이적들 (Miracles Around the Lake)

구체적으로는 갈릴리 호수 주변의 이적들

 

Q. 나에게 있는 능력 중 가장 놀라운 능력은 무엇입니까?

A. 저는 한번 마주쳐도 그 사람얼굴을 잘 기억하는 능력이 있어요. 예를들어서 저희 가족이 지난주 가족여행을 정선으로 다녀왔는데 화암동굴을 올라갈 때 모노레일을 탔습니다. 그 때 옆에 탄사람을 또 다른 여행지에서 만나면 기억하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서론>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 특히 갈릴리 바다라고도 불렸던 갈릴리 호수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길이갸 약 21km, 너비 13km 정도 크기 되는 호수입니다. 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과 제자들의 첫 번째 선교 활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그저 옷을 만지기만 했던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소녀를 살리십니다. 또 고향에서 설교하시고,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파송하시며, 떡 몇 개와 물고기로 많은 이를 먹이시고, 물 위를 걷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적’ 자체라기 보다는 그 ‘이적’이 갖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이적들을 보여주셨던 것은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 떻게큰일을행하사너를불쌍히여기신것을네가족에게알리라하시 니"(막 5:19).

 

1. 마가복음 4:35-4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요약: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쉬러 가시기 위해 배를 타고 이동합니다. 그때 갑자기 광풍이 불고 배가 요동하기 시작하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능력으로 잠잠하게 해주신 내용>

Q.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적은 언제인가요?

A. 최근에 말씀의 능력, 기도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시고 기도의 능력은 상황을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켜주는 것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요일 교과 제목이 폭풍을 잠잠하게 하심인데 최근 몇주동안 저의 마음에도 폭풍이 쳤습니다. 한 친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참 힘듭니다. 그 친구는 목회자라서 최근에 어떻게 하다가 불현 듯 그 친구의 이름을 보고 .. 갑자기 마음에 폭풍이 치는 것이지요..그 친구는 저랑 성향도 많이 다릅니다. 삶이 저보다 더 극적으로 변화됐고 친구들에게서 신앙적으로 더 인정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의 연약한 부분이기도 한데.. 저는 막내이고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다 보니까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조금 있는 편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저에게 있습니다.. 이 신앙적인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어떻게보면 조금 좋을 수 있는데 또 어떻게 보면 위험하기도 한 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을 떄, 백성들의 신앙적 존경심이 그 지도자들을 향해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것을 참지를 못합니다. 마음속에 질투가 있고 사람들의 존경을 자기가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도 그런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힘들었고 또 그 친구와 신앙적으로 부딪혔을 때 마음이 힘들고 했던 기억들도 떠올라 일하면서도 계속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했던 과거의 선택들부터 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힘드니까 진짜 할 수 있는게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주 이번주 교과 말씀을 공부하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축복하시려고 이렇게 은혜받는 귀한 직분을 주셨다고 생각을 다시한번 하게 됐습니다. 이번주 말씀을 보면 마가복음 6장에 제자들을 둘씩 둘씩 파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제 마음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하나님께서는 그친구와 나를 각기 다른 제자로 부르신 것이고 각각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도록 한 거구나.. 베드로 같은 제자도 있고 마가요한 같은 제자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걸 어제 말씀을 묵상하다가 탁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마음속의 폭풍을 잠잠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바꿔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참 놀라웠습니다.

 

시대의 소망 -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에 의뢰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조용히 쉬신 것은 “땅과 바다와 하늘의 주”의 입장에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을 그는 버리셨던 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그는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능력에 의뢰하셨다. 예수께서 쉬신 것은 믿음 곧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였으며 폭풍을 잔잔하게 한 그 말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예수께서 믿음으로 아버지의 보호 안에서 쉬신 것처럼 우리도 구주의 보호 안에서 쉬어야 한다. 제자들이 예수를 의뢰하였다면 저들은 평강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위기를 당했을 때 저희의 두려움은 그들의 불신을 드러내 주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예수를 잊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저희가 자기 의뢰의 절망에서 예수께로 돌아갔을 때 뿐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폭풍을 만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본받아야할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의뢰하고 능력 안에서 쉬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그 능력과 사랑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때 제자들이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셨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붙드셨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주변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수 있는 길은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붙드는 모습을 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2. 마가복음 5:1-20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

 

<요약: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후 육지를 밟으셨습니다. 그곳은 거라사인의 마을이었는데 갑자기 광인이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는데 그의 안에 있던 귀신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칩니다. 여기서 광인이 엎드렸을 때 사용됐던 헬라어 동사는 프로스키네오 인데 ‘경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가 귀신에 붙들려 당신을 향해 울부짖었지만 그의 심중에 속삭이는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놀라운 선교사가 됐습니다!> 

 

<영감의 교훈 읽기> 

"고침을 받은 두 광인은 그리스도께서 데가볼리 지방에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신 최초의 선교사였다. 겨우 잠깐 동안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을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예수의설교를한번도들은적이없었다.그들 은그리스도와함께있었던제자들이가르칠수있던것 처럼 사람들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가 메시아라는 증거를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들 은저희가아는것곧그리스도의능력에관하여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전할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340).

 

Q. 이 광인이 비록 귀신에 들렸지만 그의 마음속의 깊은 간구는 나를 치료해주세요. 나를 구원해주세요였습니다. 혹시, 이렇게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넉넉히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나요? 있으시다면 어떤 것 때문에 그런 확신을 갖게 됐는지 나눠볼까요?

 

3. 마가복음 5:21-34 야이로 그리고 혈루증 여인

 

<요약: 야이로라는 유대인의 회당장이 자신의 딸을 치료해달라고 옴. 치료하러 가는 중에 예수님의 옷자랅을 누가 만짐. 12년을 혈루증을 앓던 여인.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주심. 그래서 이제 야이로의 딸의 치료하러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전갈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간구를 예수님께 드리러 왔습니다. 빨리 예수님께서 가서 치료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손을 빨리 얹어서 그의 딸을 치료해주시면 좋겠는데 천천히 가십니다. 그리고 심지어 한 여인을 만났고 그여인을 치료해주십니다. 아, 이때 야이로의 마음은 그럴거 같아요. 빨리 갔으면 좋겠는데 치료까지 하시네. 어, 그런데 여인이 나았네? 내 딸도 나을 수 있겠다! 

그런데, 갑자기 전갈이 와서 딸이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빨리 가셨으면 딸이 안 죽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 예수님께서는 그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면서 달리다굼 하셨도 딸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이 것을 한번 자세하게 볼 필요가 있는데 <마가복음의 2번째 센드위치 구조> 이 이야기가 연달아 일어나고 이게 마가복음에서 2번째 센드위치 구조라고 합니다.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끼어 있는 구조라는 의미입니다. 센드위치를 혹시 빵만 막으시는 분 있나요? 네. 센드위치는 같이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2이야기를 같이 한번 이해해보겠습니다. 회당장이라는 직분에 대해서 먼저 알아봅시다. 유대의 회당제도는 포로생활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기에 유래됐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있었고 예수님도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회당을 관리하는 사람이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예배를 주관하고 기도를 하고 율법서와 선지서를 읽고 설교를 할 사람을 택하는 일을 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보면 회당장이라는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습니까 낮은 사람이었습니까?

높은 사람,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신분이 낮은사람.. 그리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여성, 회당장 야이로는 남성, 혈루증을 앟던 여인은 자신의 치료, 회당장 야이로는 자식의 치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신분이 낮은자나 높은자나 여성이나 남성이나 자신의 구원이나 자식의 구원이나 모두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다.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심 - "예수께서는 침대 곁에 가셔서 당신의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그 집에서 흔히 쓰는 말로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의식이 없는 몸에 즉시 미세한 움 직임이 일어났다. 생명의 맥박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입 술은미소와함께열렸다.소녀는마치잠에서깬것처 럼눈을크게뜨고곁에있는사람들을이상하다는듯 이 쳐다보았다. 소녀는 일어났다. 부모는 팔로 딸을 꼭 껴안고 기쁨의 울음을 터뜨렸다"(시대의 소망, 343).

 

Q. 예수님을 따르고 믿으면서도 어떻게 삶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을 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예수님 은 우리에게 왜 그런 경험을 주셨다고 생각합니까? 

 

A. 계속 예수님을 의지하라고 그런 경험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결론: 마가복음은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 거라사인 지방의 광인을 선교사로 만들어주신 이야기,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 12년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회복시켜주신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누구냐고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대답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나의 구원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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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마가복음에 나타난 비유들

성경/마가복음|2024. 8. 2.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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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가복음 4장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이 비유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이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달인이셨고 실물교훈의 장인이셨습니다. 그리고 천연계속에서 언제나 진리를 이끌어 내셨습니다. 우리가 살펴볼 마가복음 4장의 비유도 예수님께서 동동 떠 있는 배 위에서 바로 앞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던 말씀들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천연계의 환경에 둘러 쌓이셨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며 말씀을 전했던 듯 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공관복음서 (마태, 누가, 마가) 중 비유가 가장 적은 책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오늘 마가복음에 나온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요점들을 이해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씨뿌리는 자, 등불, 헤아림(척도), 자라나는 씨, 겨자씨의 비유 등 총 5가지 비유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오늘 씨뿌리는 자의 비유르르 중심으로 비유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함께 나누기 – 막4장 4-8절 읽기>

길가: 즉시 새들이 먹어버림

돌밭: 뿌리를 못 내림. 며칠 후 햇볕에 타버림

가시밭: 어느정도 선장, 가시에 막혀서 열매즐 맺지포함

좋은 땅: 작물의 일반적 성장과정을 거침. 시간은 제일 오래걸렸지만 열매를 맺게됨

비유가 주는 교훈- "씨뿌리는자와씨는다동일하다. 그렇게 하심으로 주님께서는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 리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기대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 하지못한다면그책임이말씀에있는것이아니라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 결과가우리의통제를벗어나있는것이아니다.물론우리 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 져 있으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일 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실물 교훈, 56).

예수님의 해설

예수님께서 이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한번 이번에도 성경을 함께 읽으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답 찾기 – 막 4장 14~20절 읽기>

 

정리를 해보면

 

뿌린씨: 말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우선, 땅이 4가지로 다 달랐습니다. 이 따잉 다르다는 것은 듣는 사람의 유형이 다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땅의 종류가 달랏듯 사람이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 새들이 씨앗을 빼앗아가는데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가는 사람 

돌밭: 기쁨으로 말씀을 수용하나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박새 속에서 넘어지는 사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제자도를 벗어버리고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지지않고 얕은 헌신을 가진 사람들, 즉 영원한 제자가 아닌 일시적 제자들을 일컫습니다. )

가시밭: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및 기타욕심 때문에 말씀이 막혀서 결실이 없는 사람. 이 부류의 사람들은 돌밭 사람들이 시련의 때에 떠나갔지만 오히려 좋은 때에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떠나는 사람드링빈다. 

좋은 땅: 말씀을 듣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입니다.

씨의가치를생각하라 - "그는 밭에서 씨를 뿌리는자 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오셨다.예수께서말씀하시는비유그자체가곧씨 앗이었으며 그는 이 씨로써 가장 귀중하고 은혜로운 진리들을 심으셨다. 씨뿌리는 비유는 너무나 평범하기에 사람들은 그 비유의 참 가치를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농부가밭에뿌리는씨를통하여복음의씨,곧파 종되면 패역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그 씨를 생각하기 바라신다"(실물교훈, 33)

7월 23일 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막4:9-12 읽어봅시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비유로 가르치신 것은 외인을 어둠 가운데에 두려 하신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다른 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행동과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9, 10을 인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장의 이 기별은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일깨워서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사야 6장에서 인용하신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막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입견과 마음의 완악함이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어떤 종류의 밭이 될지는 각자가 선택합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드릴지 아닐지도 모두 스스로 결정합니다. 결국, 선택은 각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Q. 성경은 흔히, 비유의 책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왜 사용하셨을까요?

A. 알기 쉽게 (반은 맞고 반은 틀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 "그는 비유로써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외식(外飾)과 악행을 견책하셨고 비유의 말씀으로써 골수를 쪼개는 듯한 진리를 싸셨다. 만약 그가 노골적으로 질책하셨더라면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않았을뿐아니라즉시그의전도사업을제지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밀정들이 손을 쓰지 못하게 하시는 한편 오류가 밝히 드러나도록 진리를 천 명(闡明)하셨으므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그의 교훈 으로 유익을 받았다"(실물 교훈, 22).

네 마가복음 4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구절 즉, 비유를 다시 묻는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제자들이 결국에는 이해가 안됐으니까 다시 여쭤본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이렇게 비유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막 4:1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오늘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비유의 기능인데, 비유의 첫 번째 기능은 드러냄과 감춤입니다. 어떤사람에게는 드러내고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감추는 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36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대중에게는 감추시고 소수에게는 드러내신다는 사실입니다. 비유는 감추인 것을 간절하게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됐습니다.   

넉넉함과 빼앗김의 원리 – 비유의 기능 2번째

마 13:5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푸는  원리들을 설명해주신 후 제자들에게 물어봅니다. 깨달았느냐? 네 깨달았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게 바로 비유의 기능 2번째인 넉넉함과 빼앗김의 원리입니다. 비유를 깨달으면 넉넉하게 더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지만 비유에 대한 꺠달음이 없으면 있는 것 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넉넉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마다 마치 새것가 옛것을 그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마13:52)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즉, 비유를 한번 이해해서 넉넉하고 풍성하게 받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 사람들이 새것과 옛것, 즉 구약과 신약의 곳간에서 마음껏 복음의 진리를 내어쓰는 집주인인 것입니다. 

 

<읽어주세요! 결론>: 마가복음 4장의 다섯 가지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님은 성장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뿌려 주신 씨가 자라서 열매 맺고 큰 나무가 되기를 바라지만 사람의 완악함은 진리를 자라지 못하게 한다. 비유는 현실을 말하지만 모든 내용이 현실과 연결되지 않고 핵심을 통해 중요한 사상을 전한다. 예수님은 지혜롭게 비유를 통해서 모두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기별을 주신다.

 

깨달은 바: 달란트의 비유 + 씨뿌리는 자의 비유 + 자라나는 씨의 비유 등

 

예수님의 비유를 우리도 제자들처럼 알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의 마음밭을 잘 가꾸어서 우리의 마음밭이 좋은 밭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또, 마음밭이 좋은 밭이 된다는 것은 심겨져서 결실을 맺는다는 의미이므로 믿음의 결실을 맺어 하나님을 뵈옵는 날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는 음성을 듣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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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예수님의 심리치료, 안식일의 의미, 세리 계급

성경/마가복음|2024. 7. 2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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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가복음 2장의 성경구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마가복음 2장 1-12절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 요약: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분의 행동과 말이 사랑이었고 또 예수님께서 많은 귀신들린자들, 환자들을 치료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그날도 어떤 집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던듯 합니다. 이 모습은 이미 마가복음 1장 33절에서도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는 구절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있던 한 집에 갑자기 지붕이 열리고 어떤 병상이 내려옵니다. 한 중풍병자가 병상에 누워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4명이 중풍병자를 무리가 많아 예수님께 데려 갈 수 없음을 알고 지붕을 뚫고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의 발 아래 내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논쟁'이 생깁니다. 바리새인들이 '저 사람이 누구관대 죄를 사한다고 말하는가?'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시고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갑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놀랍니다.
  • 지붕을 뚫을 수 있었을까? 당시 이스라엘의 주택은 아래 사진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붕이 평평했다고 하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 사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무리를 헤집고 몇번이고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절망했습니다. 나의 치료자 예수님께서 바로 앞에 계신데... 조금만 나아가면 만나뵐 수 있는데...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 중풍병자는 친구들에게 요청을 합니다. 나를 지붕으로 데려가서 내려주라! 친구들도 이 믿음의 요청에 응답했고 지붕에 힘들게 올라갔고 지붕을 뚫고 환자인 친구를 내려줬습니다. 그렇기에 이 구절에서는 "저희의 믿음, 그들의 믿음"이라고 표현됐습니다.
  • 마가복음 2장 5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겠지만 선천적 환자와 후천적 환자가 있는데 중풍병자는 후천적 환자였습니다. 곧 그 자신의 죄악된 생활의 결과로 중풍 병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죄에 대한 후회를 거듭거듭 했고 그 후회에 의해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육체적으로 불편한 것보다 마음으로 죄에 대해 괴로워함이 더욱 컸기에 그의 심중의 무거운 심적질병이자 영적질병의 치유를 먼저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 마가복음 2장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 예수님께서는 이 환자에게 먼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고 서기관들에게 2장 9절의 말씀을 하신 후, 중풍병자에게 다시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것을 먼저(죄사함) 하고 그다음 쉬운 것(일어나 걸어가라)은 자동적으로 하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꼐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을 때 이 환자의 마음에는 용서의 평강이 임했고 하늘의 빛이 그의 얼굴에 빛났습니다. 죄로인한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자 육체적 고통이 사라지고 온몸이 변화된 것을 느꼈습니다. 죄인이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는 어린아이같은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환자는 더이상 아무 요청도 하지 않았고 행복해하며 누워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치유 뒤에 육체적인 치유가 있었습니다.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죄악된 결과로 육체적 질병을 얻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에는 죄의 불안과 죄에 대한 후회로 채워지지 않는 무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병을 치료자이신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가장 큰 것을 먼저 치료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 중 누군가가 마음의 병이 있거나 육체적 질병에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의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병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번뇌했던 시간들이 쌓여 얼굴에 수심이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사람들의 좋지 않은 시선을 경험하고 그것이 마음에 상처가 돼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주님은 그 모습을 어떻게 하시는 분이십니까? 가장 먼저 마음을 치료해주시고 어루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괜찮다.. 다 나앗다. 내가 있다"
  •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 - 마가복음 2장 1-12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들에게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할 수 있고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13-22 <세리 마태, 금식 논쟁>

  • 요약: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레위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레위 마태는 잔치를 엽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곳에 제자들과 함께 참여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세리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님께서 이에대해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레위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전해지는데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그가 딱 하나 갖고 간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세금 장부를 기록했을 때 썼던 '펜' 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그 펜으로 마태복음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 시대상으로 바라보는 '세리 계급' - 당시의 유대인들에 내려지는 격언 중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세리가 집에 들어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해진다 <Misahnah의 정결과 부정에 관한 Tohoroth> 이렇듯, 세리계급은 당시에 엄청나게 멸시 받는 계급이었습니다. 더 생각해보면, 세리 직업의 사람들은 당시 자국인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박 아래 있었을 때 자국민들의 세금을 걷어 로마정부에 갖다 바쳤던 로마 소속 공무원이었기에 우리나라로 치자면, 친일파였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세리들과 함께 식사했을까요?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서기관, 바리새인들보다 세리와 다른 공공연한 죄인들이 더 희망이 있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숨기지 않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영과 혼과 몸을 더럽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었기에 천국에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병적 상태를 깨닫고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6:3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에게 가서 고침을 받으려고 노력합니다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예수님은 자신이 부요하다고 하는 자들, 자신이 건강하다고 하는 자들이 아닌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7)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막2:23-28>

  • 요약: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격노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 믈라코트: 당시 유대인들은 '믈라코트'라는 규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 행동강령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믈라코트는 율법주의의 상징입니다. 이 규례에 있었던 것이 바로 '안식일에 벼 이삭을 자르는 일을 금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 다윗이 진설병을 먹음 -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던 이 사건은 삼상 21:1-6절에 나와있습니다. 사울왕에게 쫓기고 있던 다윗이 방랑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놉당에서 배가 고팠던 다윗이 제사장에게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어봅니다. 레위기 법에 의하면 안식일이되면 일주일간 근무했던 제사장이 서로 교대하면서 12덩이의 떡 덩이들을 교환하고 제사장들만 먹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날이 정확하게 안식일이라고 확인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떡은 대게 안식일에 교환을 하는데 교환을 하고 시간이 지났으면 분명, 제사장들이 다 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취해지지 않은 떡을 보면 그날이 안식일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렇게 먹었는데 하물며, 안식일을 제정하신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하는 말씀입니다. 
  • 안식일: 구약의 안식일은 예배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안식일 개혁에 관한 내용입니다. 신약에 나타난 안식일은 '영혼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살리는 날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안식일, 예수님과 함께하는 안식일은 '예배를 회복함과 동시에 사람을 살리는 날'로서 그 의미를 어떻게 복음적으로 구현해내야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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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장 "나를 따라 오라" (메시야 비밀)

성경/마가복음|2024. 7. 1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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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1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어부가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

오늘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그분의 사역의 원천이 기도임을 느끼며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기도의 삶을 살고자 말씀을 폈습니다.

1. 12제자의 공식적인 출범- 마가복음 1장 16-20

어부들을 부르심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각 2명의 어부를 따로 부르는 내용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엄청 좋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마가는 요한과 야고보를 그들의 아버지 ‘세베데’, 그리고 삯꾼들과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요한과 야고보가 시몬과 안드레보다 더 좋은 형편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가가 이 두명의 각기 다른사람의 형편이 한쪽은 가난하고 한쪽은 더 형편이 좋았다 라고 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경제적 여건이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삼으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다고 보시면됩니다.
  • 그리고 함께 이 성경절을 읽었는데 이 4명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이 어떻습니까? ‘과정이 생략’ 돼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단순하고 직접적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보면 이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행동이 약간은 우발적이거나 현실적으로 어려워 도피하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네. 이해를 돕기 위해 요한복음 1장 35, 40절을 살펴보겠습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사람과 함께 섰다가

(생략)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 이들(베드로의 형 안드레, 사도 요한)은 침례요한의 회개에 대한 기별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침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기전에 예수님에 대해 알았고 침례요한의 기별을 통해 마음을 준비했던 듯 합니다.
  •  그래서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우발적으로 따른 것은 아닌듯 합니다. 베드로 역시도 안드레가 예수님에 대한 소개를 했을 때 직접 그분을 뵙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마가복음에서는 즉시, 곧 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며 직접적이고 간결하게 사건을 서술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그래도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불러주셨을 때 그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즉시로 예수님께로 갔음을 말해줍니다. 마가는 요한과 야고보가 아버지를 두고 간것을 ‘버려두고’라고 표현할 정도로 예수님을 즉각 따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 말하는 “나를 따라오라”는 부르심은 ‘전임제자 (full-time)’로의 부르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제 예수의 학교에서 배우고 전도하고 이후에 교회를 설립하는 가르침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12제자처럼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 또는 평신도 목회자일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가 출범하는 상황에서 12제자의 헌신과 봉사는 절실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28절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눅 4:31-37)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 이 당시에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심에 권세가 있고 서기관들과 같은 형싱적인 설교와 가르침이 아니었기에 군중들이 놀랐습니다. 
  •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존재를 말해줍니다. 이 귀신들린자의 역할은 악과 선을 드러내주는 역할,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줍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마가복음에서 등장하는 신학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메시야 비밀'입니다. 메시야 비밀이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와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이 로마에 의한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존재로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 사역이 어려움을 겪게 되실 것을 피하시고자 이 자에게 '잠잠하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 - 기도 (막1장 35-39절)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자들, 귀신 들린 자들 그리고 소문이 퍼지면서 온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앞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피곤하셨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새벽 미명에 무엇을 하러 가셨습니까? ‘기도’를 하러 가셨습니다.
  • ‘미명’이라는 단어는 아닐 미자, 밝을 명자를 써서 아직 밝지 않은 때 즉, 새벽을 의미합니다. 찾아보니까 유대인의 관념으로는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였다고 합니다. 이 이른 시간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러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일상에서 늘 기도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던 예수님 (눅 6장 12절)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 이 구절은 이제 공식적으로 12제자를 임명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앞에 기도하셨던 구절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까 사역을 하셨을 때처럼 일상에서도 기도하셨고 하나님 사역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 기도하셨습니다.  이 구절에 예수님께서는얼마나 기도하셨다고 나오나요? 네 맞습니다. 밤이 새도록. 여기서 사용된 ‘밤이 맞도록’에 해당하는 단어가 의학적으로 쓰일 때는 밤새 병간호를 한다는 표현을 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 읽었던 마가복음 구절과 지금 누가복음 구절에서 조금 다른점이 있는 것 같아요. 아까 읽었던 마가복음 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러 가셨다고 나왔는데 지금은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럼 종합해보면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 우리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 하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쩌면 매일 기도시간을 정하고 기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때 겪게 되는 문제가 기도가 자칫 형식적이게 되거나 마음없이 기도드리게 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일입니다. 분명, 계획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틀에 갖춰서 기도하지 말고 장소를 바꾸거나 기도시간을 늘여보거나 하는 등의 노력도 필요할 듯 합니다.
  • 저도 아침에 기도를 매일 같이 드렸던 적이 있는데 시간을 정해두고 해서 나의 삶이 돼서 좋았는데 그안에서 더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기도하지 못해서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기도하는 장소를 바꿔보기도 했습니다. 집에서만 기도하다가 잘 안될 때는 산으로도 가보고 산책을 가보기도 하고 그러니까 확실히 좋긴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걸려서 그렇지.
  •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일상이나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나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기도와 실제 행동을 일치 시키기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은 애절하고 절박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홀로 천연계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일하던 곳에서 떠나서 들로 가시고 푸른 골짜기로 가서 명상하고 또는 산비탈이나 삼림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셨다. 이른 아침에 그는 흔히 외따른 곳에서 성경을 상고하거나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신 분이셨는데 기도하실 때 어떤 분이셨다고 나오나요? '그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대면하고 기도하고 대화하실 때 가장 행복해했던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으로 행복하십니까? 우리가 삶에서 조금씩 조금씩 기도로써 예수의 모본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시간이 행복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아래도 제가 좋아하는 내용의 책인데 한번 보시죠!

구주께서 신적 능력을 소 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필요를 느꼈다면, 연약 하고죽을수밖에없는죄인인우리는얼마나더열렬 하고 끊임없는 기도의 필요를 절실히 느껴야 할 것인가! ...그분은 금식하셨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열렬 한 기도와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굴복함으로 승리자가 되셨다. 마지막 시대에 진리를 믿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기도의 위 대한 모본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의 실천과 치유의 생애셨습니다. 위에 나온 성경구절들에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결코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에 그분의 능력의 원천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예수, 우리도 그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기도가 부족한 모습을 많이 봅니다.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조엘 비키라는 사람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의 기도생활을 연구한 후 "오늘날 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이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 루터는 매일 3시간씩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성경연구를 하기 가장 좋은 시간에 오히려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래 기사에서 내용이 좋아 인용했습니다!

루터의 친구인 바이트 디트리히 “한 번은 나는 그가 기도드리는 것을 볼 기회를 가졌다. 기도 속에서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얼마나 영과 믿음을 다해서 기도드리는지! 그는 하나님께 어울리는 최고의 경외심으로 기도했고 마치 아버지나 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망과 믿음으로 기도했다. 그가 하나님과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의 영혼에 뜨거운 열정의 불이 붙었다.”
 

전설적 기도생활 실천한 루터 매일 3시간, 규칙적 기도 - 아이굿뉴스

기도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조엘 비키(Joel R. Beeke. 1952~)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의 기도생활을 연구한 후에 오늘날 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이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

www.igoodnews.net

 

우리모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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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세상의 종말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성경/요한계시록|2024. 6. 30.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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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 4).

--> 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천국에 가게되면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하나님께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나와있습니다. 근데, 기억절에보면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 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참 감사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은 기쁨도 많이 있겠지만 슬픔도 많이 있습니다. 또 다가오지 않은 슬픔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어진 기억절 말씀을 보니까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많은 슬픔의 눈물을 하나님께서 닦아주시고 또 우리가 지금 느끼고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픔들이 없다고 하니까 참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주 교과에서는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는 일들을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끊임없는 사랑으로 대쟁투를 끝내시고 완전하게 승리하시는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나의 선택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임을 느낀다.

Q. 요즘 내가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이 있으면 편하게 이야기 나눠볼까요?

사단은 짐승을 동원해서 일요일을 예배일로 강요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 짐승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두뿔 달린 양입니다. 두뿔 달린 양을 닮았으나 용처럼 말하는 세력은 곧 미국입니다. 미국은 곧 땅의 짐승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미국은 강제력을 동원해서 바다짐승인 로마카톨릭과 바다짐승의 우상인 타락한 개신교 세력에게 경배하게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예배하는 일요일을 강요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이 강요하는 일요일 예배가 곧 짐승의 표가 될 것입니다. 또 일요일 예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매매를 못하게 하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땅의 짐승인 미국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경제 및 군사 패권을 공고히 하는 시기가 있는데 그 시기는 곧 지금입니다. 

코로나 때 우리는 모두 백신을 맞아야 했고 백신을 맞았다는 것을 보여줘야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당연히 되었습니다. 그와같이 마지막 때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 같은 이적을 일으켜서 이 일에 속도를 붙일 것입니다. 

이렇게 짐승의 표를 강요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큰 외침’으로 세상의 위기에서 견고하게 될 영광스러운 사명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외침을 외치지만 당장의 위협에 굴복해 짐승이 강요하는 날을 예배함으로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고 모든 이의 운명이 결정되는 은혜의 시기가 끝날 때가 곧 올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시기가 끝나는 떄에 개국 이래 그때까지 없던 환난이 내리게 되는데 계시록 16장에는 이것을 7재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7재앙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땅에서 짐승과 그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가 남-무서운 종기가 이 사람들에게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재앙으로 구원받을 백성과 멸망받을 백성이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2. 두 번째 재앙은 바다가 피로 변하는 재앙- 이 재앙은 애굽에 내렸던 10재앙 중 나일강이 피로 변해 고기가 죽고 악취가 나게 했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므로 2째 재앙도 이것이 상징이 아니라 실제 일어날 일임을 짐작케합니다. 
  3. 강과 물의 근원이 피로 변함 – 바닷물이 피로 오염되는 것보다 물의 근원이 피로변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4. 태양이 뜨거워져서 사람을 태우는 일이 일어남

*1-4째 재앙은 생명과 밀접한 관련 있는 천연계에 내리는 재앙

5.땅의 거민들에게 흑암과 아픈 고통이 임함-혀를 깨물고 죽고싶어할만큼 아픈 고통이 임함: 이일을 통해 결국 짐승이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무력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5번째 재앙은 인간만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권위가 이 땅의 거민들 앞에서 엄청난 굴욕을 당하게 되는 재앙입니다.

6. <아마겟돈 전쟁>지도권을 확립하는 일- 아마겟돈은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로는 하르마게돈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아마게돈’이라고 합니다. 대중적으로는 세상의 종말을 말할 때 쓰이는 단어이지만 기독교에서 유래한 단어이기 때문에 더 자세한 설명으로는 세상의 종말에 일어날 최후의 전쟁이 일어날 장소가 곧 아마겟돈이다 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앞서 5번째 재앙에서 짐승의 권위가 굴욕을 당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짐승의 세력이 지도권을 회복하고 재확립하는 일이 일어나겠습니다. 어둠의 권세가 세상의 모든 권세를 모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마겟돈 전쟁을 준비합니다. 사람들은 이 전쟁을 세계3차 세계대전이고 이 전쟁을 통해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주인은 인간도 아니요 사단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에 의해 이 세상이 멸망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마겟돈 전쟁은 무엇이냐면 악의 세력이 세상의 모든 세력을 모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 전투는 그리스도와 악의 세력간의 최후의 전투가 되겠습니다.

7. 용(사단)과 짐승(로마 카톨릭)과 거짓 선지자의 삼중 연합은 일곱 번째 재앙으로인해 세 갈래로 갈라져 힘을 잃음- 그리고 지금껏 없던 큰 지진으로 인간의 모든 물질 세계가 파괴되고 100근이나 되는 우박으로 인간이 만든 모든 세상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7재앙이 있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용혁이가 다니엘서 12장1-2절> 

<다니엘서 12장: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네 읽어주신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하하심을 받는다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예레미야 30장 5-7절 한번살펴보겠습니다>

5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떨리는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
6
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남자마다 해산하는 여인 같이 손으로 각기 허리를 짚고 그 얼굴 빛이 창백하여 보임은 어찜이뇨
7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이는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로다

 

<그러나, 그가 이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로다 -->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로다>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당장의 어려움을 피하려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재앙가운데 고통을 겪게되고 더 나아가 타협하게 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도 잃게 됩니다. 반대로, 충성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 있을 때, 애굽의 10재앙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해주셨 듯 하나님의 백성들을 7재앙의 때에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환난의 떄를 중보자 없이 통과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말은 하나님을 따를지 안따를지에 대한 최후의 결정이 이뤄졌기 때문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중보자의 역할이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환난의 때를 이겨내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때에도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환난의 때에도 그분의 백성들을 지켜 주신다는 분명한 소명을 붙잡고 승리하는 우리들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Q. 다가올 환난의 때를 통과할수있게하는유일한준비는무엇인가?

<요일 3: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맞이할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과거는 괜찮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선택에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잘못된 선택을 해서 점점 악에 사로잡혔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늦게찾아온후회-그가자기의상실한인격을 되찾기 위하여 재물과 향락을 희생시키려고 하였을 때 에그는이미악한자의손아귀에서무력하게되어있었 다....일단그불행한사람이자기의세력아래들어왔 을 때에 마귀는 그를 참혹하리만큼 잔인하게 취급했고 성난 가운데 끔찍스러운 재액을 안겨 주었다. 악에 굴복 하는 자는 모두이와같이될것이다.그들의초기의생 애에 맛본 매혹적인 향락은 절망적인 흑암이나 영혼을 망치는 광증으로 끝을 맺게 된다(시대의소망, 256)

--> 우리가 아까 느끼기에서 읽었던 대로 ‘오늘 나의 선택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임을 느낀다’고 읽었는데 우리가 오늘 선택하는 일이 우리의 미래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악을 선택하면 점점 이 가버나움의 광인처럼 될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을 계속 선택하면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론: 이 시대의 종말과 7재앙 이야기를 들을 때는 두려운 마음이 둔다. 종말과 재앙에 초점이 맞춰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그 본질을 본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종말과 7재앙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만나러 이곳에 다시 오실것이라는 너무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말자! 기쁜 마음으로 주님 만날 준비를 오늘 당장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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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최후 공격: 안식일

성경/요한계시록|2024. 6. 2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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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는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강신술입니다. 지난주 교과 내용입니다. 사탄은 강신술을 통해 마지막 날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안식일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경배받으시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기념일에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날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오늘교과는 이 창조와 예배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날 안식일을 지켜야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땅에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사단처럼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자신을 예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쟁투

그리스도와 사탄의 쟁투는 예배를 둘러싸고 하늘에서 시작되었고 그 마지막 절정 또한 예배를 둘러싼 쟁투가 될 것이다. 최초에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습니다. 루스벨과 하나님의 쟁투였습니다. 성경에는 루스벨의 품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 14). 영감의 글에는 ‘그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의 애정과 충성에 하나님을 최고로 삼도록 노력하는 대신에 그들의 봉사와 충절을 자기 자신이 받으려고 노력하였다’고 기록 됐습니다. 즉. 사탄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데 자신이 하늘에서 예배와 존경을 받고자 노력했습니다. 사탄은 이렇게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어떤 대상에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대한 쟁투가 최초의 하늘에서 일어었고 최후의 쟁투에서도 ‘예배의 대상’이 그 주제가 될 것입니다.

<계 14장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네. 사도 요한은 이상 중에 하늘로 올려져서 24장로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예배에서 24장로가 하나님을 찬양함)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어준 말씀에서 하나님을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 묘사하며 경배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하늘의 24 장로 또한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다’ ‘주는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 요한계시록에서는 ‘우리가 왜 하나님을 예배드려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이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경배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볼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와 하나님의 창조를 분리할 수 없은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안식일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창조의 기념일이고 그 창조의 기념일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제도는 하나님께 창조함을 받은 우리가 예배드려야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제도입니다.

<성경 계시록 14장 9절 말씀에는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방금 읽었던 셋째 천사의 기별 부분을 쉬운성경으로 한번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 그 진노의 포도주는 물을 타지 않은 독한 술이다.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이 보는 앞에서 유황불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여기서 ‘짐승의 표’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각 시대의 대쟁투는 말합니다. "넷째 계명을 지키는 대신에 국가의 법률과 일치되도록 거짓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세력에 충성하는 표가 되는 한편,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창조주께 충성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05).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이 거짓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14장 12절 말씀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교과에 있어서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12은 이렇게 헌신하여 구주를 따르는 사람을 "예수의 믿음" 을 가진 자라고 말한다. 예수의 믿음은 앞이 보이지 않는 때에도 여전히 신뢰하는 깊은 믿음이다. 이는 이해할 수 없을 때 인내하는 믿음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받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임박한 쟁투를 헤쳐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려주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근본적인 상징이다. 따라 서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단 7:25 참조) 안식일을 무너뜨리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을 찬탈하려는 것이다.

Q. 안식일과 예수믿음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 - "안식일은 창조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살아 계신 참 하나님 께로 향하게 한다. 하나님의 창조력에 대한 사실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방의 신들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이 시라는 증거로 성경 전체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안식일 을 계속 준수해 왔다면 사람들은 창조주를 기억하고 사 랑하며  존경과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며  따라서  우상숭배자나  무신론자  그리고  이교도는  하나도  생겨 나지 않았을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382~383).

*안식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안식일을 계속 우리 인류가 준수했더라면 우상숭배자, 무신론자, 이교도 등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준수에 따라 하나님을 끝까지 예배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충성의 큰 시금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특별히 투쟁의 초점이 되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마지막 시련이 닥쳐홀 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섬기지 아니하는 자들은 구별하는 선이 그어질 것이다. 넷째 계명을 지키는 대신에 국가의 법률과 일치 되도록 거짓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반다되는 세력에 충성하는 표가 되는 한편,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창조주께 충성하는 증거가 된다. 그리하여 한 계층의 사람들은 세상의 세력에 복종하는 인을 받음으로써 짐승의 표를 받는 반면에 다른 한 계층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충성하는 표를 받는 길을 택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을 받게 된다. [각시대의 대쟁투, 605]

-> 너무나 분명한 말씀입니다. 안식일 계명 대신 세상의 권위에 복종해 국가의 법률로 지정된 거짓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많은 사람이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권위에 충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 때에 짐승의 표에 대해 ‘베리칩이 짐승의 표다, 바코드가 짐승의 표다.. 달러의 숫자,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활동 등이 짐승의 표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안식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짐승의 표 또는 하나님의 인을 받게 될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11

 

Q.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뭘까?

 

<기도부분> 분주한 일상 속에서 내리는  결정  가운데  하나님을  마 음에  모시지  않음으로  하 나님의  뜻과  다른  결정을  내릴  때가  있음을  봅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하나 님을  신뢰하며    뜻을  따 를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월요일 다가오는 위기

 

예수님꼐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사탄의 멸망은 확정됐고 예수님의 승리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혼자 멸망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그들까지도 멸망에 빠뜨리려고 계획했습니다. 그 일을 사탄은 속임수를 통해 진행했습니다. 이 속임수는 역사를 통해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육신은 추악하고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선하고 영원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지난 주 내용인데,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영혼 불멸설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행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다는 율법주의 사상이 팽배하도록 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가톨릭을 통해 그 일을 했습니다. 법왕이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고해성사에 대해서도 사제는 그리스도가 부여한 죄들을 실제로 삼으로 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골 2장 8절)고 경고했습니다. 사탄은 그렇게 속임수로 사람들을 미혹하지만 속임수가 통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력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종교 개혁시대에도 사단은 활동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속여 신앙을 잘못된 방법으로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참 신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자 화형에 처하게 하고 죽게 만들었습니다. 루터, 칼뱅, 틴들, 위클리프 등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무력에 의해 폭력에 의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사탄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 무력과 박해를 가하는 것은 가인과 아벨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는 이에 대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수많은 종교박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네로황제가 가한 종교 박해 사건들을 모두 알 것입니다. 네로황제는 (64년-68년)에 특히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는 로마 대화재 사건의 용의자로 자신이 지목받자 대중의 의심을 다른데 돌리기 위해 기독교인들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 씨웠습니다. 네로에 의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짐승의 가죽을 덮어 쓰고 사냥개에게 물려 죽거나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화형에 처했습니다.

 

이외에도 트라야누스 시대, 하드리아누스 시대,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의 시대 등에 긴 기간동안 기독교인들이 종교박해를 당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의 역사도 반복됩니다. 사탄은 자신의 속임수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 무력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공격하는데 이 일은 마지막 떄에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계시록 13장 15절, 17절에는 마지막 벌어질 핍박을 예언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제제의 형태로 시작이되고 그럼에도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사형이라는 선고를 받게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전체결론 말씀: Q.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어떻게 지킨다는 것인가?

 

제칠일의 예배뿐 아니라 모든 예배의 진정한 기초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별하는데서 나타나게 된다. 이 큰 진리는 결코 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잊어버려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이 진리를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간직하게 하시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는 진리가 존속하는 한안식일도 또한 그 증거와 기념으로 존속되어야 한다 [각 시대의 대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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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마지막 쟁투와 안식일

성경/요한계시록|2024. 6. 1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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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는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강신술입니다. 지난주 교과 내용입니다. 사탄은 강신술을 통해 마지막 날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안식일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경배받으시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기념일에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날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오늘교과는 이 창조와 예배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날 안식일을 지켜야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최후의 마지막 쟁투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사탄의 쟁투는 예배를 둘러싸고 하늘에서 시작되었고 그 마지막 절정 또한 예배를 둘러싼 쟁투가 될 것이다. 최초에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습니다. 루스벨과 하나님의 쟁투였습니다. 성경에는 루스벨의 품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 14). 영감의 글에는 ‘그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의 애정과 충성에 하나님을 최고로 삼도록 노력하는 대신에 그들의 봉사와 충절을 자기 자신이 받으려고 노력하였다’고 기록 됐습니다. 즉. 사탄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데 자신이 하늘에서 예배와 존경을 받고자 노력했습니다. 사탄은 이렇게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어떤 대상에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대한 쟁투가 최초의 하늘에서 일어었고 최후의 쟁투에서도 ‘예배의 대상’이 그 주제가 될 것입니다.

 

함께 성경절을 보도록하겠습니다. 

<계 14장 7을 누가 읽어주세요!>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네. 사도 요한은 이상 중에 하늘로 올려져서 24장로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예배에서 24장로가 하나님을 찬양함)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네 . 읽어준 말씀에서 하나님을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 묘사하며 경배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하늘의 24 장로 또한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다’ ‘주는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 요한계시록에서는 ‘우리가 왜 하나님을 예배드려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이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경배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볼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와 하나님의 창조를 분리할 수 없은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안식일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창조의 기념일이고 그 창조의 기념일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제도는 하나님께 창조함을 받은 우리가 예배드려야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제도입니다.

 

<성경 계시록 14장 9절 말씀을 누가 읽어주실 수 있나요?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

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방금 읽었던 셋째 천사의 기별 부분을 쉬운성경으로 한번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 그 진노의 포도주는 물을 타지 않은 독한 술이다.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이 보는 앞에서 유황불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여기서 ‘짐승의 표’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각 시대의 대쟁투는 말합니다. "넷째 계명을 지키는 대신에 국가의 법률과 일치되도록 거짓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세력에 충성하는 표가 되는 한편,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창조주께 충성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05).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이 거짓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까 ~가 읽어줬던 셋째 천사의 기별 후에 뒤이어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계14장 12절

12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12은 이렇게 헌신하여 구주를 따르는 사람을 "예수의 믿음" 을 가진 자라고 말한다. 예수의 믿음은 앞이 보이지 않는 때에도 여전히 신뢰하는 깊은 믿음이다. 이는 이해할 수 없을 때 인내하는 믿음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받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임박한 쟁투를 헤쳐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려주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근본적인 상징이다. 따라 서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단 7:25 참조) 안식일을 무너뜨리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을 찬탈하려는 것이다.]

 

Q. 안식일과 예수믿음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 - "안식일은 창조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살아 계신 참 하나님 께로 향하게 한다. 하나님의 창조력에 대한 사실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방의 신들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이 시라는 증거로 성경 전체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안식일 을 계속 준수해 왔다면 사람들은 창조주를 기억하고 사 랑하며  존경과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며  따라서  우상숭배자나  무신론자  그리고  이교도는  하나도  생겨 나지 않았을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382~383).

 

*안식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안식일을 계속 우리 인류가 준수했더라면 우상숭배자, 무신론자, 이교도 등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준수에 따라 하나님을 끝까지 예배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안식일은 충성의 큰 시금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특별히 투쟁의 초점이 되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마지막 시련이 닥쳐홀 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섬기지 아니하는 자들은 구별하는 선이 그어질 것이다. 넷째 계명을 지키는 대신에 국가의 법률과 일치 되도록 거짓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반다되는 세력에 충성하는 표가 되는 한편,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창조주께 충성하는 증거가 된다. 그리하여 한 계층의 사람들은 세상의 세력에 복종하는 인을 받음으로써 짐승의 표를 받는 반면에 다른 한 계층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충성하는 표를 받는 길을 택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을 받게 된다. [각시대의 대쟁투, 605]

 

-> 너무나 분명한 말씀입니다. 안식일 계명 대신 세상의 권위에 복종해 국가의 법률로 지정된 거짓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많은 사람이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권위에 충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 때에 짐승의 표에 대해 ‘베리칩이 짐승의 표다, 바코드가 짐승의 표다.. 달러의 숫자,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의 활동 등이 짐승의 표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안식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짐승의 표 또는 하나님의 인을 받게 될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꼐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사탄의 멸망은 확정됐고 예수님의 승리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혼자 멸망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그들까지도 멸망에 빠뜨리려고 계획했습니다. 그 일을 사탄은 속임수를 통해 진행했습니다. 이 속임수는 역사를 통해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육신은 추악하고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선하고 영원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지난 주 내용인데,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영혼 불멸설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행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다는 율법주의 사상이 팽배하도록 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가톨릭을 통해 그 일을 했습니다. 법왕이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고해성사에 대해서도 사제는 그리스도가 부여한 죄들을 실제로 삼으로 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골 2장 8절)고 경고했습니다. 사탄은 그렇게 속임수로 사람들을 미혹하지만 속임수가 통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력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종교 개혁시대에도 사단은 활동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속여 신앙을 잘못된 방법으로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참 신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자 화형에 처하게 하고 죽게 만들었습니다. 루터, 칼뱅, 틴들, 위클리프 등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무력에 의해 폭력에 의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사탄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 무력과 박해를 가하는 것은 가인과 아벨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는 이에 대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수많은 종교박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네로황제가 가한 종교 박해 사건들을 모두 알 것입니다. 네로황제는 (64년-68년)에 특히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는 로마 대화재 사건의 용의자로 자신이 지목받자 대중의 의심을 다른데 돌리기 위해 기독교인들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 씨웠습니다. 네로에 의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짐승의 가죽을 덮어 쓰고 사냥개에게 물려 죽거나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화형에 처했습니다.

 

이외에도 트라야누스 시대, 하드리아누스 시대,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의 시대 등에 긴 기간동안 기독교인들이 종교박해를 당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의 역사도 반복됩니다. 사탄은 자신의 속임수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 무력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공격하는데 이 일은 마지막 떄에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계시록 13장 15절, 17절에는 마지막 벌어질 핍박을 예언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제제의 형태로 시작이되고 그럼에도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사형이라는 선고를 받게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전체결론 말씀: 

제칠일의 예배뿐 아니라 모든 예배의 진정한 기초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별하는데서 나타나게 된다. 이 큰 진리는 결코 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잊어버려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이 진리를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간직하게 하시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는 진리가 존속하는 한안식일도 또한 그 증거와 기념으로 존속되어야 한다 [각 시대의 대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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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8장] 성소 정결 예식

성경/히브리서|2024. 5. 2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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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8장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히 8:1, 2)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고 합니다. 대제사장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고 합니다. 이 성소와 장막이 사람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 성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윌리엄 밀러와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윌리엄 뮐러는 다니엘서 8장 14절의 말씀을 봤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뮐러는 여기서 성소정결이 불로 땅을 정결케하는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뮐러는 성경연구 중 예언의 기산점을 발견하게 됐고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님께서 성소정결을 위해 재림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대실망’ 이라고 부르는데요. 이후에 뮐러 주의자들 중 어떤 이들이 2300일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봉사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하늘 심판을 이야기하는 다니엘서 7-8장의 평행구조를 살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7장다니엘 8

이러한 유사점을 살펴보면 7장의 메데 바사와 8장의 메데 바사가 평행을 이루고 그리스, 로마 등이 각각 평행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하늘의 심판과 성소의 정결도 평행구조를 이루고 있어 성소정결이 재림전 심판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주에는 윌리엄 뮐러가 오해한 성소정결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봉사임을 살펴보겠습니다.

 

 깨닫기 : 하늘성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예언과 하나님 은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느끼기 : 우리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행하기 :  심판을 두려워 하지말고 깨어서 날마다 예수님 을 의지하는 믿음을 간직한다.

 

Q.  어떤 사실을 크게 오해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어떻게 해결되었습니까? 

 

19일(일) 하늘 성소 

 

초기 재림교회 신자들은 1844년의 실망 이후 수개월 동안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 면서 성경에는 두 개의 성소, 즉 모세가 지은 성소와 하늘에 있는 참 원형인 성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브리서 8장 1-5절 읽기>

 

1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읽은 대로 2절의 말씀을 보면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라고 했고 5절에는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지상 성소는 모세에게 보인 식양대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지상 성소는 하늘 성소의 모형이라고 불렸고 하늘 성소의 사본이었습니다. 요한은 이상 중에 하늘 성소로 안내 됐고 거기서 언약궤, 향단, 촛대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지상성소의 실제 원형을 이상 중에 봤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 제사장으로서 봉사하는 하늘 성소에 대한 증거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2300주야가 끝나는 1844년에는 여러세기전부터 지상에는 성소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하는 예언이 하늘에 있는 성소를 가리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단, 모두 아시겠지만 성소에 대해서 설명을 간단하게 해보겠습니다. 성소는 ‘성스러운 장소’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로 이스라엘 시대 때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였습니다. 최초의 성소는 이동이 가능한 천막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성소를 다른 말로 성막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성소’는 후에 고정식으로 지어지면서 ‘성전’으로 불리게 됩니다. 성소안에는 더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의 영어 명칭도 the most holy place입니다. 성소의 역할은 이곳이 하나님께서 계셨던 곳이자 거룩한 정소의 의미, 십계명이 보관된 장소, 죄사함이 이뤄지는 등의 역할을 했습니다.

 

네. 이제 다시 교과 설명을 이어가보겠습니다. 성소에서는 희생제물을 통해 제사를 드렸고 그 희생제물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우리를 위해 죽으실 예수님을 상징했습니다. 그르시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짐승의 죽음과 제사장의 봉사를 통해 우리는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와 용서함을 받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성소의 원형인 하늘성소에서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셨고 또 제사장의 봉사를 해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죄의 지배 아래 해방되고 구원의 확신과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교과 읽기: 하늘 성소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중보하심 으로 우리 삶을 붙들고 있던 죄의 속박이 깨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본성에 매 인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는 죄의 정죄함이 없으며 죄의 지 배에서 해방되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것이다.>

 

<교훈, 영감의 교훈 읽기>

 

20일 월 지성소에서 

출 34장 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방금 읽은 성경절에서 ‘용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나싸’인데, 이 의미는 ‘짊어지다, 감당하다’의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용서하시는데 그냥 용서가 아니라 죄의 결과를 대신 짊어지시고 감당해주심을 보게 됩니다. 이 것이 성소의 희생제사에서 보여집니다. 어떤사람이 죄사함을 받고자 할 때 그 사람은 희생제물을 갖고 옵니다. 그리고 그 희생제물에 손을 얹어 자신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죽입니다. 동물의 피는 성전 첫 번째의 칸에 휘장 앞에 뿌려지고 제단에 발라졌습니다. 이렇게 죄가 상징적으로 성소로 옮겨지게 됐습니다.

 

각시대의 대쟁투 내용입니다.

<죄를 뉘우치는 죄인은 날마다 그의 제물을 성막의 문으로 가지고 와서 희생 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의 손을 얹고, 그의 죄를 고백함으로 그 죄는 상징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흠없는 희생제물에게로 옮겨졌다. 그런 다음에 그 짐승은 죽임을 당하였다. 사도 바울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레 17:11). 하나님의 율법은 범죄자의 생명을 요구하였다. 죄인의 빼앗긴 생명을 나타내는 피, 곧 죄인의 생명을 대신하는 그 희생 제물의 피는 제사장으로 말미암아 성소로 옮겨져서 그 휘장 앞에 뿌려졌는데, 그 휘장 너머에는 그 죄인이 범한 율법을 넣어둔 법궤가 있었다.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죄는 피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성소에 옮겨졌다>

 

용서의 말 뜻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취하셔서 성소 안으로 직접 옮기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 성소 휘장안에 뿌려진 피는 어떻게 될까요? 이스라엘의 속죄는 2단계를 거칩니다. 첫째, 한해동안 회개하는 죄인들을 위한 피가 성소 휘장에 뿌려지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로 한해의 끝에 있는 대속죄일에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가져온 죄들을 아사셀 염소에게 옮겨서 그분의 법적 책임을 없이 하심으로 성소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아사셀 염소는 대속죄일에 2마리 염소 중 한 마리를 제비 뽑아 광야로 보냈는데 이것을 아사셀 염소라고 합니다. 

대속죄읠의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7월 1일 나팔절에 나팔이 훌리고 열흘뒤인 7월 10일 대속죄일이 시작됩니다. 대제사장은 이날 손을 적어도 10번을 씻고 5번 목욕하고 5번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성소를 지나 하나님의 법궤와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 4번을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향을 들고 들어가 향로를 내려놓고 형을 향로에 쏟아 지성소에 향이 가득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히브리서 9장 4절은 이모습을 빗대 지성소에 향로가 있다고 표현합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나올 때 대제사장의 삶에 죄가 있다면 그는 죽임을 당한 나답과 아비후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었습니다. 뜰로 나온 대제사장은 다시한번 몸을 물에 잠군 후에 숫송아지의 피를 담은 금그릇을 들고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향로가 가득한 바닥에 피를 7번 뿌립니다. 이는 사단이 정복한 땅을 주님께서 회복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성소로 나온 대제사장은 염소의 피를 갖고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성소로 나와서 처음 숫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 일부를 섞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두희생제물이 동일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뜰로 나와서 번제단의 네 뿔에 피를 바르고 4측면에 7번 피를 뿌립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미리 취해진 두 염소가운데 사단을 상징하는 아사셀 염소에게 안수하고 백성들의 죄를 그 위에 놓습니다. 

아사셀 염소는 대제사장에 의해 무인지경으로 보내진 후 놓임을 받습니다. 광야로 보내진 아사셀 염소는 첫 번째 부활 후에 1,000년 동안 무인지경인 지구에 있게될 사단을 상징하는 것이 됩니다. 대제사장은 4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앞에서 계쏙 향로를 내뿜고 있는 금향로를 가지러 지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가 성소를 거쳐 향로를 운반해 올 때 연기는 성전에 가득차게 됩니다. 그리고 화로를 뜰로 가져와서 아직 타고 있는 향의 찌꺼기를 번제단 동편 아래 버립니다. 이젠 중보도 끝나고 죄인들을 위한 유예기간도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매일의 제사의 피로 더렵혀진 성소 휘장이 제사장에 의해 제거되고 새로운 휘장이 달립니다. 이렇게 성소는 정결함을 입고 합당한 상태로 회복되게 됩니다. 대속죄일에서 대제사장의 마지막 행위는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고 금면류관을 쓰고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 성소로부터 나옵니다. 대제사장의 예복에는 금방울이 달려있었는데 금방울들이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됨을 선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봉사하셨고 2300일 후인 1844년부터 지금은 지성소에서 봉사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 성소에서 그리 스도는 먼저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봉사하셨고, 2,300일 이후인 1844년부터 지금은 지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신다.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큰 심판을 통과할 것이다.(이어서) 엘렌 화잇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아무런 공헌도 한 바 없는 당신 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시대의 소망, 25) 받았다.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볼 때, 우리는 자신을 살피고 괴롭게 하며 죄에서 돌아선다. 그것은 우리가 악을 편 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더 이상 죄를 변명하거나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 미한다. 대신 우리는 은혜 안에서 성장하며 거룩한 삶을 산다.>

 

<영감의 교훈 읽기 

대속죄일의 성소 정결 봉사 - "이 봉사로 말미암아 일  년간  매일  행한  봉사가  완결되는  것이었다.    속죄일 에 두 마리의 염소 새끼를 성막 문으로 끌고 와서 그 둘 을 제비 뽑아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 사셀을 위하'(레 16:8)게 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위 하여  뽑힌  염소는  백성을  위한  속죄물로  죽임을  당해 야 하였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 져가서 속죄소 앞과 그 위에 뿌렸다"(각 시대의 대쟁투,  419).>

 

[‘헌신’의 의미]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계속 계속 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릐 죄를 책임져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마음의 평안을 느낄 수 있고 죄를 짓는 사람들이지만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 죄를 드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진정하다면 우리는 믿음의 열매를 맺고 영화단계에서 살 수 있습니다.

  

수 지성소의 복음

히브리서 4장 14-15절을 누가 읽어주세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교과내용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굳게 잡"고, "담대히 나아"가, 결코 포기하지 말고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믿음의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님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새로운 산길을 통해 하늘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소봉사에서 성전뜰을 들여다보면 제단의 뿔에 피가발려져 있고 성전안 분향단의 금뿔에도 피가 발려져 있고 속죄소 앞 휘장도 피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이렇게 성소봉사에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하신것처럼 그분의 공의 또한 엄정하기에 죄의 값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소봉사에서 모든 길에 예수님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안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보여줍니다. 아까 말했듯 지상의 성소는 하늘성소의 사본이기 때문에 지상성소에 언약궤가 있다면 당연히 하늘성소에도 언약궤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이 땅의 어떤 권세도 하나님의 율법을 바꿀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8장 10절에는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 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서 우리는 언약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발견한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공 의와 자비를 보여준다. 이 땅의 어떤 권세도 하나님의 율법을 바꿀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것이 하늘의 언약궤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8:10은 다음 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 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이 말씀에는 ‘언약’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결국 말로하는 약속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하신 약속을 이렇게 하늘에 보관해두고 계십니다. 저는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정말 많은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거룩하고 가장 중요한 곳에 우리에게 해주신 말씀을 끝까지 보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큰 은혜가 느껴졌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듯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신다는 약속 또한 지켜주실 것을 믿도록 기도하고 싶습니다. 

<영감의 교훈 읽기>

중보자를 통해서만 자비와 구원이 허락됨  -  "지성 소의  휘장  앞에는  끊임없는  중보의  제단이  있었다.  성 소  앞에는  끊임없는  속죄의  제단이  있었다.  피와  향으 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접근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크신  중보자를  가리키는  상징들이었다.  그분을  통해서  죄인들은 여호와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을  통해서만 자비와 구원이 회개하고 믿는 영혼에게 허락 될 수 있다"(부조와 선지자, 353).

 

[교과전체 결론]

재림교회는 실망 직후 하늘 성소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게 되었다. 성소의 원형인 하늘  성소가 있으며 지금은 예수님이 그곳에서 중보자로서 봉사하시는 조사심판의 기간이다. 대속 죄일에 죄의 정결이 이루어진 것처럼 하늘 성소도 그분의 보혈로 정결하게 된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이시고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죄인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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