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 악의 문제

성경|2025. 2. 15.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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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4)

 

학습목표

깨닫기: 악의 문제는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을 따라 존재하는 문제이다.

느끼기: 하나님은 악의 문제도 사랑의 방법으로 해결하실 것이며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행하기: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어려움 중에도 자유의지로 그분을 사랑하고 따른다

 

29()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Q) 사람들 속에 있는 죄악을 보면서 정말 죄가 무서운 것이구나를 느낀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볼까요?

 

<삼풍 백화점 사건 - 원래 삼풍백화점은 삼풍쇼핑이라는 이름으로[9] 바로 옆에 있던 삼풍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대단지 종합상가[10]로 설계 건축 중이었음. 그런데, 건축주가 갑자기 마음을 변경해서 건물용도를 종합상가가 아닌 백화점으로 변경할 것을 시공사에 요구했음. 그러나, 시공사는 건물 붕괴 위험성을 이유로 증축 거부. 건축주는 이에 계약 중도 파기하고 자신의 운영사로 건축을 이어나갔음. 원래, 백화점 같은 복합 건물은 설계 변경 시 구조 전문가의 검토가 필수적인데 건축주는 그저 자신의 욕심 때문에 독단적으로 구조설계를 변경. 그 한 인간의 무서운 재물에 대한 욕망과 죄로 인해 무고한 502명의 사망자가 발생. 전쟁 재외 한국 역사상 최대 사망자 수를 기록한 사건을 보면서 죄가 참 무서운 것이구나를 느낌.

 

본문말씀1

욥기 30:26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본문말씀2

시편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레미야 12: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크게 3가지 정도 있다.

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

2.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3.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하시는데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왜 악한 사람들이 이세상에서 더 이익을 얻는가.

 

 

이런 생각은 무신론자들도 갖을 수 있지만 본문 말씀은 악인이 번성하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는 문제가 성경에서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Q.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 공기도 보이지 않는데 존재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

 

Q. 내가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왜 하나님은 응답을 안해주시는가?

 

우리가 부모가 됐다고 가정을 해보고. 부엌에서 칼질을 하고 있는데 사랑스러운 아이가 와서 아빠 나 칼좀 줘보세요. 갖고 놀고 싶어요.라고 한다면, 줄 부모가 있을까요? 아이에게 줬을 때 이것이 주어지면 안된다는걸 부모는 알죠. 하지만, 아이는 왜 부모님이 안주느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부모의 이해의 영역과 아이의 이해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그토록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나의 영생과 구원의 길에 그닥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응답을 안해주실 수 있다. (물론 사람이 아픈데 그것의 회복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는 또 다른 착한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안돼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정말 성경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죠. 너가 기도가 응답이 안돼 정말 슬펐구나.. 그런데, 성경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 다윗도 그랬고 예수님고 그랬어. 하면서 말씀으로 인도한다면 오히려 신앙이 더욱 단단해지는 계기가..

 

<교과내용>

왜 많은 경우에 악인이 번영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이익

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가? 왜 의로운 사람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는가? 악이 활개

칠 때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거

나 심지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이러한 질문이나 더 일반적인 악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라도, 우리

는 분명히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악과 그 편만

함을 과소평가하는 식으로 넘어가려 해서는 안된다. 악은 매우 나쁜 것이며, 하나님

은 우리보다 훨씬 더 악을 미워하신다.

 

<굵은 글씨 함께 읽기>

특별히 하나님께서도 악에 의해 고통당하셨으며, 이 놀라운 사실이 십자

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강력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이런 가운

데도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통해 악의 근원인 사탄을 물

리쳤고, 결국에는 악을 완전히 없애실 것이다.

 

악의 문제는 오늘날만 아니라 성경에서, 또 예수께서도 고통당하신 문제이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영감의 교훈>

주께서 요구하시는 능력 - “주께서는 그들이 고난에 대해 슬퍼하지 않고 곤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요구하신다. 아무 일에나 낙담하지 말고 모든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할 데 없는 그의 사랑의 금 사슬로 그들을 하나님의 보좌에 붙들어 매셨

. 저희는 악을 저항하는 능력과 또한 세상이나 죽음이나 혹은 지옥이라도 지배할 수 없는 능력,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처럼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여야 할 것이다

(복음 교역자, 39)

 

210()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Q) 모든 것이 이해 돼서 믿는 성도들은 없을 것입니다. 아직 이해 되지 않는 일들(갑작스러운 죽음) 에 대하여 나누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의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 볼게요

 

우리 교단에서 오래된 이야기인데, 간호학과였던 학생분이 선교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재림연수원에 기도를 하러 갔다가 청년이 끌고 내려오던 화물차에 치여 죽는 일이 있었어요. 목사님의 자녀였죠. ..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선교를 하고 싶었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다른 곳도 아닙니다. 연수원에 기도하고 말씀보러 갔는데 그런 사고를 당한 것이죠. 참담하고 슬프고 이해가 안되는 오늘 교과 제목에서의 알 수 없는 일인데.. 딸을 여읜 아버지 그 목사님께서는 오히려 책을 통해 그것을 드러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일을 통해 은혜받고 그 딸을 추모했음. 그 책이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 재림 연수원에 가면 큰 돌에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는 말씀이 있는데 아무튼.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을 겪었지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참고말씀

욥기38:1-6

1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6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참고말씀2

욥기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많은 고통과 시험을 겪고 왜 이런 고난이 자신에게 닥쳤는지에 대해 계속 질문했어요. 그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방금 읽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이 약간 동문서답같아요.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물어보시고 땅의 기초를 놓는다는 것이 뭔지를 뜬금없이 물어보세요.

알 수 없는 것을 물으시는 겁니다.

 

참고말씀 2에 보면 욥이 이제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뒤의 성경절을 보면 욥이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이제 내 생각보다 내 논리보다 큰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겁니다. 이렇게 더 큰 분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욥은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욥은 이해로 신앙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물론, 신앙에서 이해와 납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가장 밑바닥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바로 세워져야 하는 겁니다.

 

믿음은 정보, 지식이 아니고 나보다 크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그분께 신뢰하고 맡기는 겁니다.

 

<교과내용>

교훈 답을 모른다 해서 좋은 답이 없다거나, 답이 오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

.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아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선함을 신뢰해야 한다


<영감의 교훈>

설명할 수 없는 신비 - “그들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이런 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의심한다. 여기에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불신과 의심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고 구원에 필수적인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 죄의 존재에 관하여 질문하면서 하나님께서 결코 계시하지 않으신 것까지 알아내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있다”(각 시대 의 대쟁투, 492).

 

211() 회의적 유신론자

 

Q) 허망하기는 하겠지만 살면서 꾸었던 꿈중에서 가장 좋았던 꿈을 꾸었던 경험에 대해 나누어볼까요?

 

회의적 유신론자지금 우리 세대의 모습이 아닌가 싶어요.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지만 얼굴도 희망차지 않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없고 더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 모습.

이렇게 살아가니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신앙을 포기하게 되고 거절하게 되는 상황.신앙이 인생에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을 하는겁니다. 점점 신앙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살다가 신앙을 포기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성경말씀에 두셨어요. 우리에게 희망이 될만큼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고 설명해주고 싶어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과 연결돼 있다고도 말씀하셨어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궁금증에 대한 비밀을 성경 말씀에 두셨다는 겁니다.

 

<영감의 교훈>

공정한 보응의 날 - “악한 자가 번영하고, 그들이 당신께 대한 적의를 나타내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죄악의 잔이 찰 때 모든 사람이 그들의 완전한 멸망 가운데서 그분의 공의와 자비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보복의 날, 곧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그의 백성을 학대한 모든 자가 공정한 보응을 받는 날, 그의 충성된 백성에게 행한 모든 잔학하고 불의한 행위가 그리스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인정되어 벌을 받는 날이신속히 다가오고 있다

(각 시대의 대쟁투, 48).

 

212() 자유의지론

 

Q.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는 강요되는 사랑은 기쁨이 아니라 공포입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랑을 강요 받았던 경험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본문말씀

창세기 2:16-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교훈>

자유의지론은 그것을 오용한 결과 악이 생겼다고 본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것

을 주신 것은 고귀한 사랑, , 기쁨도 그것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감의 교훈>

자유의지를 주시는 이유 - “사랑의 율법은 하나님 정부의 기초이므로 모든 지성적 존재들의 행복은 그들이 이 의의 대원칙과 완전히 일치함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사랑의 봉사 곧 당신의 품성을 인식함으로 솟아나는 봉사를 원하신다. 그분은 강제적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존재로 하여금 당신께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신다”(부조와 선지자, 34).

 

213() 사랑과 악

 

본문말씀1

로마서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본문말씀2

요한계시록 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참고말씀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다. 음울한 그늘이 밝아지고 세

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탄의 기만적 세력이 깨어져야 했다.

이것은 힘으로는 할 수 없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과는

배치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봉사만을 원하시는데 사랑은 명령으로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힘이나 권위로 얻을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이 사탄의 성

품과 대조되어 드러나야 한다”(시대의 소망, 22).

 

<교과내용>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은 그것이 사랑의 필수 요건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의지를 오용하는 것이 악의 원인이다.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있

지만, 하나님이 그토록 악을 미워하시면서도 잠시 악을 허용하신 것은, 악의 가능

성을 배제하게 되면 사랑의 가능성도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악이 초래한 문제가

모두 드러나기 전에 그것을 소멸시킬 수 없는 것은 사랑에 필요한 신뢰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감의 교훈>

오늘날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선택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지적 존재로서의 특전을 박탈하는 것이며, 단순한 자동인형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의지를 강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사람은 자유로운 도덕

적 행위자로 창조되었다. 다른 모든 세계의 거민들처럼, 그는 순종에 대한 시험을 받아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대항할 수 없는 어떤 유혹이나 시련도 그에게 오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부조와 선지자, 331)

 

 

참고말씀2 <죄가 용납된 이유>

 

비록 사탄이 하늘에서 추방되었을 때에라도 무한하신 지혜자는 그를 멸하지 않

으셨다.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봉사뿐이므로, 당신의 피조물들

의 충성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와야 했다. 하늘과 여러 세

계의 거민들은 그 당시에 죄의 참 성질과 결과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

로 사탄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를 즉각적으로 멸

망시켰더라면 사랑에서가 아닌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섬겼을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기만자의 영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반역의 정신도 완전히 근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궁한 세대를 통한 온 우주의 복지를 위하여, 사탄이 그의 원

칙들을 충분히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그의 비난을 모든 피조물이 바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그리고 그분의 율법의 불변성

에 대하여 영원히,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남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사탄의 반역은 앞으로 오는 영원한 세월을 통하여 우주에 한 교훈, 즉 죄의 본질과

그 무서운 결과에 대해 영속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증언이 될 것이었다. 사탄의

통치가 낳은 결과와 그것이 사람들과 천사들 모두에게 끼친 결과는 하나님의 권위를

버린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 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

조물들의 행복이 그분의 정부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거할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이 무서운 반역의 경험의 역사는 모든 거룩한 존재자들에게 영원한

안전 장치가 되어 저들이 범죄의 본질에 관하여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며, 범죄하

거나 그 죄의 형벌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42).

 

결론

악의 문제는 예수님도 당면하셨으며, 우리는 답을 알 수 없는 많은 문제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것이 답이 없다는 뜻은 아니며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 악의 가능성에도 그분이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사랑, 선한 것도 자유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악의 문제도 사랑의 원칙을 따라 대하시고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성소를 볼 때 우리는 정의롭고 심판하시는 주님을 보며 선악의 대쟁투 가운데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댓글()

공의로운 하나님,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의 결정체다

성경|2025. 2. 8.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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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라는 단어는 공평(公平)과 정의(正義)를 하나로 줄인 말입니다. 공평할 공, 도리 의자 공평한 도리라고 의미가 해석됩니다.

 

기억절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 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 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기억절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찬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이 진정으로 자랑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 학습목표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은 원수마저 사랑하시지만 공의를 어기지 않으시며 사랑을 이루신다.

느끼기 : 하나님이 돌이키시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그 사랑은 변함없다.

행하기 :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굳게 잡고 세상에서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따른다.

 

도입질문) 비뚫어진 사랑, 무서운 사랑을 보거나 경험한 적이 있나요?

 

8개월 전 뉴스에 보도된 사건인데, 수능만점자 출신 의대생이 여자친구가 헤어지자는 말에 수차례 흉기로 찔러서 숨지게 했다는 뉴스. 이런 것들을 보면 비뚫어진 사랑이고 무서운 사랑인데,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2월 2일(일) 사랑과 공의

 

Q) 공의를 실행해야 하지만, 그 가운데 사랑의 마음이 있어서 가슴 아팠던 경험이 있다면 이야기해볼까요?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특별히 예뻐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티는 안내는데.. 그 친구들도 잘못할 때가 있단 말이죠. 그럼 이렇게 차분하게 잘못을 따로 불러서 이야기해줘도 아이들이 그 한마디 한마디에 눈물을 보이기도 합니다. 참...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이들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을 할 때가 있어요.

 

본문성경 1

시편 33: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본문성경 2

렘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 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 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문성경 3

시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Q) 본문성경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교과내용>

진정한 사랑은 공의를 요구하며, 공의는 사랑을 통해서 다스리고 실현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원하시며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공의’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해봅시다. ‘공의’는 ‘불의’와 대조되는 말이고 ‘진리’와 그 의미가 비슷합니다. 이 ‘공의’에 대해 뭔가 이애할 수 있게 해주는 영감의 글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영감의 글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거룩한 ‘공의’아래서 고통을 받고 계셨다. 그분은 ‘공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셨다.

 

이 문장으로볼 때, 공의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겠죠.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죄의 값에 대한 올바른 도리’라고 표현을 해볼 수 있겠다.

 

사람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사랑’과 ‘공의’를 놓고 봤을 때 이것이 모순되는데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해결하십니다.

십자가는 은혜를 붙들지만, 죄를 가리지 않아요. 

은혜와 진리가 충돌하지만 은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진리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서는 죄의 댓가는 죽음인데,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사랑과 공의를 다 충족시킵니다. 

이것이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공의’를 이해하게 하는 예화가 성경에 한번 더 나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 도덕적인 정신이 부패해졌어요. 회개를 하였으나 죄의 결과는 남았어요. 그런데, 그의 아들이 이제 반역을 하면서 자신을 궁지로 몰아 넣어요. 다윗이 모욕을 받으면서 도망을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때 ‘공의의 하나님’을 이해했던 듯 합니다.

 

  • 참고말씀 <부조와 선지자>

 

다윗은 자신의 죄에서 그가 고통당하는 원인을 찾았다. 선지자 미가의 말은 다윗의 마음을 감명시킨 그 정신을 풍기고 있다.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할”(미 7:8, 9)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다. 가장 쓰라린 학대와 모독 중에서도 겸손과 무아의 정신과 관대함과 유순함을 나타낸 그의 이 같은 경험의 이야기는 그의 온 생애의 경험 중에 가장 고상한 사건 중에 하나이다. 이스라엘의 통치자 다윗이 가장 처절한 외적 굴욕을 당하던 이 시간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더 위대한 때는 결코 없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다윗이 범죄하기를 계속하여도 견책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면서도 왕위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하셨더라면 회의론자와 이교도들은 다윗의 역사를 인용하여 성경의 신앙을 비난하는 어떤 핑계를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으로 하여금 겪게 하신 그 경험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당신께서 죄를 허용하시거나 묵인하실 수 없으심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다윗의 역사는 또한 하나님께서 죄를 처리하시는 크신 목적을 우리로 알 수 있게 하며, 비록 가장 침울한 형벌을 통하여서도 당신의 은혜와 자비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우리로 알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회초리 아래로 지나가게 하셨으나 그를 멸하시지 않으셨다. 풀무는 정결하게 하기 위함이지 태워 없애 버리기 위함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시 89:31-33)리라 하셨다. 

 

  • 죄에 대한 댓가는 분명히 치러저야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를 가리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죄인에게 사랑과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 수 있어요.

 

<영감의 교훈>

공의에 나타나는 사랑 -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 비에 못지않게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진리와 공의 로부터 자비를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율법의 의가 평화의 적이 된다는 것을 밝혀 보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는 이것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단단히 결합되어있으므로 전자는 후자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다"(시대의 소망, 762).

 

2월 3일(월) 전정으로 선하고 의로우하신 하나님

 

Q) 말과 행동이 달라서 실망해 본 경험들 있으면 함께 나누어 볼까요?

 

  • 본문성경 습3:5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은 불의를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말로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이라는 책을 알고 있어요. 사도행전 뜻이 무엇일까요? 

사도는 예수님의 사도라는 의미이고 ‘행’과‘전’은 행할 행, 전할 전 즉, 사도들이 행동을 전한 것을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들은 말만 전하는 ‘언전’의 삶이 아니라 행동을 전하는 ‘행전’의 삶을 살았어요.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도들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월요일 교과 제목처럼 전적으로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교과 교훈은 말합니다.

<교훈> 

하나님은 온전히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악과 연관이 없다. 세상 신은 그들의 힘 을 따르고 숭배하게 하지만, 그분은 오직 공의와 사랑으로 권능을 행사하신다.>

 

2월 4일(화) 변함 없으신 하나님 / 2월 6일(목) 사랑과 정의를 굳게 붙잡고

 

화요일교과와 목요일교과의 주제가 비슷해 함께 진행합니다.

 

Q) 시간이 지나도, 사람이 불편해도 오래도록 사랑해본 경험을 나누어볼까요?

 

  • 윌리엄캐리 선교사 이야기

 

한결같은 모습은 참 아름다워요. 힘들어도 어려워도 바뀌지 않고 변함 없이 없는, 한결 같은 모습들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윌리엄 캐리라는 사람은 인도 선교의 아버지인데 7년동안 선교를 했는데 단 1명의 영혼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반응 없고

열매 없고 사역을 하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렇게 힘든데 설상가상으로 서재에 화재가 나서 

3개의 인도어 성경 번역, 문법책 2개, 사전이 불탔습니다. 

그런데 캐리는 변함 없이 다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캐리는 25년가까이를 인도에서 선교하는데  풍성한 기름 부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 시작부터 부흥하는 모습도 좋지만, 첫 시작은 미약했지만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성실하게 신실하게 사역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본문성경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본문성경 2 <시 100: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Q)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고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하시다 못해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형이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해 이야기해준 이야기가 있는데 형이 매일같이 기도의 동산에 올라갔데요. 대학교 시절동안 계속. 그런데, 꽃이 필만한 곳이 아닌데 꽃이 피어있더랍니다. 1년뒤에도 거기에 꽃이 다시 피고 2년뒤, 3년뒤, 군대 전역한 후에도 그곳에 꽃이 다시 피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구나라는 걸 느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정말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말 나의 모습을 볼 때 나를 버리셔도 상관이 없으신데.. 힘들어도 손해가 되어도 나를 사랑해주신다는 약속을 지켜주시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의대생의 안타까운 살인사건을 보면 사랑이 살인으로 바뀝니다. 인간의 사랑은 힘들고 상황이 바뀌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아요. 매일 해가 뜹니까? 매일 뜹니다. 매일 밤이 찾아오고 매일 달이 보이고 별이 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는 정말 신실한 하나님이야’라고 말씀해주시는 겁니다.

 

  •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사랑

내가 좋아하는 사람 잘 맞는 사람 사랑하기는 너무나 쉬운데 관계적으로 불편하거나 괜히 부딪히는 사람 사랑하기는 정말 어려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성경 3 <마5:43-35>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뿐만아니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길 원하신다고 교과는 말합니다.

 

<화요일 영감의 교훈>

영원한 본성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그분 의 본성과 그분의 율법은 사랑이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 러하였고 미래에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의 행하심 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며,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 시는 분은 변치 않으신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 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합 3:6; 사 57:15; 약 1:17). 창조력의 현현 하나하나는 모두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 다. 하나님의 통치권에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완전한 축복이 포함되어 있다"(부조와 선지자, 33).

 

 

2월 5일(수)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다니

 

Q) 누군가와 불편했던 관계가 회복됐던 경험이 있다면 나눠볼까요?

 

  • 참고말씀 1 말3:6-7

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7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 본문성경 <출애굽기 32장 14절>

 <출 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말라기 3장 6절의 말씀을 보시면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하고 다음에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인 말라기 3장 7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말 3:7>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함 없이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 사랑에 반응할 때 

하나님을 거역할 때와 다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에 보면>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회개하거나 중보에 대한 응답으로 

심판을 돌이키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변함이 없기에

죄인인 내가 기도해도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실거야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변함 없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회개 할 때 관계를 회복 시켜주는 주님 바라보시고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도 주께 나갈 수 있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 역시도 다른 사람이 어떠하든 신실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타내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저부터도 참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게 참 어려운 일인데 그래서 하나님과 가깝게 지낼 필요가 있는 듯 합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들었던 링컨’이라는 책에 보면 링컨 대통령의 일화가 나와요. 미국 역사상 스탠톤이라는 사람처럼 링컨 대통령을 일찍부터 모욕한 사람이 없었어요. 스탠톤이라는 사람은 링컨 대통량을 향해 ‘저급하고 교활한 어릿광도’ 등으로 모욕했는데 참 놀라운게 링컨 대통령이 스탠톤이라는 이 사람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겁니다. 제가 대통령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일인데.. 그리고 링컨은 최고의 예우를 갖춰 그를 대해줍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죠. 세월이 흘러 링컨 대통령이 극장에서 암살을 당하게 됐고 시신이 안치된 좁은 방에서 제일 많이 슬퍼하고 울었던 사람이 그때 링컨을 모욕했던 ‘스탠턴’이라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는 링컨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관계에도 이런 회복의 역사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과를 이해 하게 하는 네 번째 질문입니다.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신 하나님처럼 

누군가와 불편했던 관계가 회복된 경험 있다면 나누어보겠습니다

 

도무지 함께 할 수 없을 거 사랑과 공의의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해결하십니다.

십자가는 은혜를 붙들지만, 수준을 낮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깊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 것은

예레미야 9장 24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자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정의를 말씀 하실 때 

말로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십니다

바라기는 전적으로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처럼

말과 일치한 삶이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흐름에 따라

만나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결 같이 공의에 사랑을 담아 역사하십니다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또 모든 시간속에서 

그리스도의 공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늘 사랑하시면서

우리가 회개 할 때 관계를 회복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바라기는 우리도 한번 원수는 영원한 원수가 아닌

어떤 관계라도 회복할수 있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은 악과 연관이 없으시며, 온전히 선하시고 정의를 사랑하시기에 불의와 악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 그분은 원수마저 사랑하시지만 공의를 어기지 않으시고 세상에서 정 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며 요구하신다. 그분은 인간과의 관계에 따라 말씀을 돌이키시지만 이는 오직 사랑이며 자비하신 그분의 성품 때문이다. 그의 사랑과 공의는 언제나 변함없으며 오직 공의와 사랑으로 권능을 행하신다.

 

  • 끝기도: 하나님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더하게 해 주시니 그 은혜를 인하여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경험적으로 이 지식을 더하게 해주시고 우리가 삶에서 자랑할만한 것이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있게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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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

성경/말씀 묵상|2025. 2. 1.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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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시78:38)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을 의미하죠. ‘진노’..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진노를 나타내시는게 말이 돼냐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야하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교과에는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고 나와 있어요.

Q 도입질문) 흔히, 성질 더러운 사람이 일을 더 잘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거 맞나요?

깨닫기 : 하나님의 진노는 피조물의 복락을 위하는 그분의 사랑의 합당한 표현이다.

느끼기 : 하나님은 자비하시지만 죄를 정당화하지 않으시며 십자가로 대속하신다.

행하기 : 그분이 진노하며 심판하는 뜻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한다.

1월 26일(일) 죄악으로 슬퍼하심

Q)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잘못 혹은 실수로 인해 화가 났던 적이 있나요?

본문 성경: 시편78편 40~60절

40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42
그들이 그의권능의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43
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소안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

.(생략)

.
51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52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53
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

.

.

56 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57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58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59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묵상)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나타내는 고린도전서 13장(사랑장)에는 ”사랑은 성내지 않으며“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왜 시편 78편에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일까?

 

네 우리가 여기서 올바로 이해해야하는 건 ‘분노’ 혹은 ‘진노’에 2가지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불의한 분노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분노입니다. 내가 미움 받았고 내가 불공평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화를 내는 ‘이기적 분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진노’는 공의로운 진노입니다. 즉, 나 자신을 위한 분노가 아니요 이스라엘 전체를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분노입니다.

그런데, 시편78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 공의로운 진노조차도 여러번 여러번 거듭거듭 돌이키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공의로운 분노인데 그것을 다 실행하지 않으시고 공의로운 분노는 잘못이 없는데도 계속 그것을 자제하시고 용서해주셨다고 나옵니다. 왜냐하면, 공의로운 분노 때문일지라도 사랑하는 내 자녀가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기를 극도로 자제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악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하심은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입장에 대해서 설명을 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을 한번 보면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중 곤경을 겪고 있을 때 교회의 대표자가 링컨 대통령을 찾아옵니다. 대표자는 링컨을 격려하면서 ”대통령 각하, 우리는 주님이 우리 편에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어요. 링컨 대통령은 이에 대해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이 어느 편에 계시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주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함께하신다는 증거와 그들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여주었어요. 하지만, 조금만 눈에 안좋게 보이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죄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슬퍼하셨어요. 링컨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늘 그들의 편에 서계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가 짧게 읽었던 시편 78편은 ‘아삽’이라는 사람이 쓴 시입니다.  아삽은 레위 지파 사람이었고 – 레위 지파면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 아삽은 마에스트로였다고 합니다. 지휘자죠. 다위 왕 때에 봉사하는 성가대가 3조가 이었는데 그 중 한명의 지휘자. 구약시대 성가대 최고지휘자.

아삽은 돌이켜야 할 것은 하나님이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임을 알고 시편 80편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시편80편 14-19


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6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7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 참 어리석습니다. 그렇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게 그간 얼마인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기간이 얼마인데, 눈에 조금이라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또 자기 눈에 부정적으로 보인다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말씀을 계속 묵상해보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누구에요? 저입니다... 그래서 아삽이 시편 80편에 쓴 이 말씀이 위로가 되는 겁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아삽의 시가 나와 있어요.

 

아삽의 시가 어찌보면 참 뻔뻔하다고 할 수 있네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께 악을 범했는지 적었는데 또 이렇게 회개의 노래를 하니까요.

 

아삽이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오직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긍휼’은 영어로는 Mercy로 표현할 수 있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라함’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해요. 라함은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용되는 ‘긍휼’을 우리가 읽을 때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이라고 기본적으로 이해하면 될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젖을 빠는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가지는 반응 등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표현을 우리가 곧잘 보곤하는데 그럴 때는 이스라엘이 죄에서 돌이켰을 때 주어지는 용서의 은혜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자체에 분노하시기보다는 ‘악’에 대해 슬퍼하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악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곧 우리들을 헤치기 때문이죠. 인간은 언약에 성실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돌이키기만한다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교과는 말합니다.

 

<영감의 교훈>

회개의여지를주심-"이감사할줄모르는백성을 완전히 멸절시키지 않은 일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나타났다. 그분은 스스로 미혹을 당하도록 허용한 회중에게 회개의 여지를 주셨다. 주님, 곧 저들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지도자께서 이 일에 그토록 큰 인내와 긍휼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은,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와 겸비로 그분께 돌아갈 때, 그분께서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까지도 기꺼이 용서하신다는 증거로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교회증언 3권, 355).

 

1월 27일(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Q.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했는데 용서를 못한 적이 있나요?

 

본문성경절: 욘3:1-4:3

 

1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니느웨로 가니라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

.

.

9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묵상) 왜 요나는 니느웨를 멸하지 아니하신 하나님께 불평했는가? 왜 그는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확신했는가?

 

<배경 설명>

니느웨라는 곳은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성경에서 흔히 ‘앗시리아’라고 오늘날의 이라크라고 합니다. 이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입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갈라진 시기에 여로보암2세가 왕위에 있을 때 활동하던 선지자였어요. 그런데, 당시 앗수르라는 나라는 실제로 북방 이스라엘의 인접지역에서 그들을 위협하던 국가였어요. 실제로, 40년후에 북방이스라엘은 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특벽히 요나는 이 앗수르 사람들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을 것 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민족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곳을 다 불살랐고 모든 성인 남자들의 손과 귀를 자르고 눈도 뽑아내고 극악무도하게 죽였어요. 또 소년들과 소녀들도 산채로 불태워 죽였고 왕의 유흥을 위해 사람들을 산채로 껍질을 벗기곤 했다고 합니다. 진짜 악하디 악한 사람들이었어요.

 

 

요나는 그 도시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게 하심으로 그 성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았을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인해 기뻐했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여김을 받을 가능성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평판에 눈이 멀어 그는 그 불쌍한 도시에 있는 영혼들의 무한히 큰 가치를 보지 못했다. 회개한 니느웨 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동정을요나는 몹시 싫어하고 성냈다.요나가 여호와께 여쭈어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1, 2)고 하였다.


요나
는 다시 한 번 의문을 제기하고 의심하는 그의 성벽에 굴복하게 되었고 또 다시 그는 낙담과 좌절감에 억눌리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은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그는 살아서 그 성읍이 구원 받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났다고 느꼈다. 그는 불만족이 가득해서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를 보여준다.

 

 "노하기를 더디하"심 또는 "오래 참으"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구절은 문자적으로 는 '코가 길다'로 번역할 수 있다. 히브리 관용구에서 분노는 은유적으로 코와 연관 되어 있는데, 사람이 화를 드러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코의 길이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 "코가 길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분이 노하기를 더디하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화를 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하나 님은 지극히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은혜를 아낌없이 풍성하게 베푸시면서도 죄 를 정당화하거나 불의에 눈 감지 않으신다. 그 대신, 십자가를 통해 죄와 악을 속하 심으로 하나님은 공의롭게 행하시며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분이 되신 다(롬 3:25, 26).

 

 

<영감의 교훈>

징벌과 자비가 완전히 부합되는 분 -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출 34:6, 7), ... 하나님 정부의 권위와 능력은 반역을 진압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보응하는 징벌을 나타내는 모든 일도 자비롭고 오래 참고 긍휼이 많은 하나님의 품성에 완전히 부합될 것이 다"(각 시대의 대쟁투, 541).

 

1월 28일(화) 의로운 분노

 

Q) 혹시, 내가 냈던 화 중에서 ‘의로운 분노’에 속하는 것이 있다면 나눠볼까요? 

혹은 의로운 분노란 무엇일까요?

 

본문 성경1: 마21:12-13절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함을 짓밟고, 과부와 고아, 가난한 사람 들을 편취하는 방편으로 삼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분노인 '거룩한 진노'를 보이신다(마 21:13, 요 2:16 비교).

하나님의 성전은 은혜로운 용서와 죄인을 정결케 하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배가 됐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귀한 마음을 갖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착취해서 그것들을 자신들에게 이롭게 사용해 장사하는 소굴로 만들어 버렸어요. 원래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 뜻하신 바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렵혔고 악을 행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의로운 분노를 표출 하신 겁니다. 

 

본문 성경2: 막10:13-14

 

13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본문 성경2에도 예수님께서 노하시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는 어린아이들이 오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의 어머님들께서 아이를 데리오 예수님께 나아오자 꾸짖었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오해받게 두시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의로운 분노를 다시한번 나타내셨어요.

 

본문 성경 3: 막3:2-5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완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셨어요. 여기서 예수님의 분노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강퍅한 것을 보고 슬퍼하시기 때문에 나타낸 분노였어요. 

 

우리가 살펴본 이 3가지 예수님의 ‘의로운 분노’는 결국 

 

 

다른 곳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대해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하려 하자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 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셨다(막 3:4).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막 3:5) 그 사람을 고치셨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분노는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슬퍼하시기 때문이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분노가 사랑의 공의로운 진노인 것과 같은 사랑의 의분이다. 사랑이 악에 대해, 특히 그 악이 사랑의 대상을 해할때 어떻게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악이 사랑의 대상을 해칠 때 사랑이 악에 대해 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 나님은 사람의 완악함에 슬퍼하며 사랑으로서 죄에 대해 공의롭게 진노하신다.

 

정당한 분노 -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정당한 분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수치를 받으시 고당신의사업이누명을쓰는것,무죄한자가억압당 하는 것을 볼 때는 의분이 심령을 격동시킨다. 민감한 도덕심에서 나온 이런 분노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일상 의 도전에 대해서 분노나 적개심을 품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사탄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하늘과 조화되기를 원한다면 원한과 증오심이 심령에 서 추방되어야 한다"(시대의소망, 310)

 

결론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생각하는 진노와 다르다. 진노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불의의 진노이고 또 하나는 공의의 진노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진노가 곧 공의의 진노이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그 죄로 인해 그 자녀까지 죽게 만드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진노 역시도 하나님께서는 거듭거듭 돌이키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자녀들이 고통스러워 하실 것을 차마 못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듭거듭 진노를 돌이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품성이시다. 반면, 이기적 진노란 요나가 니느웨로 기별을 전하러 갔을 때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한 것. 그것이 곧 이기적 분노에 해당한다. 요나는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취급 받을 까 곧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여겨질까하여 하나님께 분노한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로운 진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진노조차도 우리를 위해 거듭거듭 돌이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영혼을 '긍휼히'여기신다. 그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은 곧 엄마가 아기를 돌보는 그런 측은한 마음이다. 언제라도 하나님께 돌아가자!

 

 

 

 

 

 

 

댓글()

[요한복음] 요8:51-59, 요12:1-12, 요18:28-40 <아브라함, 빌라도, 마리아, 도마 의 증언>

성경/요한복음|2024. 11. 17.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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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세대가 믿을 수있도록 증거를 제공한다. 요한의 때에는 그저 믿었던 예언, 말씀이 오늘날 성취된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할지라도 말씀을 통해 믿으며 예수께서 구주이심을 세상에 증거한다.

 

도입질문) 당신이직접보지않아도분명히믿을수있는것이있습니까?그것은무엇입니까?


1. 아브라함의 증언

 

본문성경절 요8:51-59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

.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예표와 약속을 통하여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갈 3:8)셨다. 그러므로 그 부조의 믿음은 오실 구주에게 고정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셨다.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려진 어린양은 우리 대신 희생당하시기로 되어 있던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여 죽을 운명에 처했을 때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쳐다보며 죄인에게 ‘살라. 내가 대속물을 찾았노라’고 말씀하신다”(부조와 선지자, 154)

 

묵상1) 예수님은 왜 그분을 만난 아브라함의 기쁨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우리가 읽은 내용 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브라함 자손에 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네가 무엇이관대’ 우리를 자유케 한다 하느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지 말씀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올 것을 인해 기뻐했다. 근데 너희는 오히려 나를 죽이려고 하고 나를 믿지 않는다. 너희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나를 믿을 것인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마귀에게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쁨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까 아브라함은 생전에 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했다고 하시면서 너희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의 기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묵상2) 아브라함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기뻐한건가? (영감의 교훈에 그 답이 있다)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를 본 아브라함 - "이 무서운 시련이 아브라 함에게이른 것은 그에게 그리스도의날을보고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도록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주어진 교훈 중에서 가장 큰 교훈을 하나님에게서 배웠다.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그의 기도는 응답 되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보았다"(시대의 소망, 469).

 

아브라함이 보고 기뻐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서 바치려고하는 그런 투쟁 속에서 실제 바치기로 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그 자신의 모든 일련의 과정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인류에게 보내주신 그 사랑의 깊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시는 그 고통과 사랑의 마음으로 인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


마리아의 증언

 

본문성경절 요12:1-6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나사로는 예수와 함께1)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참고성경절

막16:9

요11:43

눅 7:39

묵상1) 시몬의 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행위가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월요일 소지 제목이 ‘마리아의 증언’인데, 이 제목에 한번 빗대어 질문의 답을 생각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우리가 먼저 마리아의 배경에 대해 알 필요가 있어요. 성경에 따르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7귀신 들린 사람이었어요. 그것은 마리아가 7가지 죄악의 덫에 사로잡혔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죄에서 자유케 하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신실한 증인이 됐어요.

 

또 향유 옥합 사건이 있기 전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오빠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직접 목격했어요.

 

그래서 종합해보면 마리아는 자신을 죄에서 해방시켜준 예수님, 그리고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그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행위를 한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녀가 당시 1년치 노동값에 해당하는 그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행위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던 ‘신령과 진정으로’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것이 곧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건데 마리아의 이 행위가 이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진정으로 나의 구주로 여길수만 있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을겁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을 통해 거듭난 영혼은 이렇게 변화된다고 증언 하는 겁니다.

 

구주의 시신에 아낌없이 부으려고 했었던 향기로운 선물을 그녀는 산 몸 에부은것이다.장사때에사용했다면무덤을채웠을뿐이겠지만지금이향기는마 리아의 믿음과 사랑의 보증으로서 예수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이 받으실 큰 시련의 어두움으로 내려가실 때에 당신이 구속하신 자들 에게서 받으시게 될 열렬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그 행위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가 셨다"(시대의 소망, 560).

 

-> 제가 지난번에 죽은 친구를 이야기하면서 그친구와 크레이지 아케이드게임도 하고 같이 축구도하고 학창시절에 너무나 큰 행복을 준 친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는데요, 그 친구는 가면서도 저에게 좋은 기억과 추억을 주고 떠난 거죠. 그런데, 과연 그 친구도 나와의 추억이 행복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온정과 치유와 자유를 주시고 떠나실 것이지만, 마리아의 행동은 떠나시는 예수님의 길에 열렬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기억을 갖고 떠나셨다는 사실이 감동이 됩니다.

 

<영감의 교훈>

향유를 부은 동기 - "마리아는 예수님에게서 그의 죽 음이 가까움을 알리시는 말씀을 듣자 깊은 사랑과 슬픔 으로 예수에게 경의를 표하기를 원하였다. 개인적으로 크게희생하여그는예수의몸에부을'값진향유'한옥 합을샀다.그러나지금많은사람은예수께서왕이되 시려고 한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마리아의 슬픔은 기쁨 으로 변하였으며 그는 제일 먼저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열망하였다. 옥합을 깨뜨리고 그는 향유를 예수의 머리와 발에 부었다"(시대의 소망, 559).

 

질문1) 예수님이 당신의 삶에 꼭 필요한 존재인가요?

 

저는 죄책감의 무게가 너무 커서 이걸 내가 해결할 수가 없구나를 느꼈는데 그래서 내 삶에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아버님과 갈등이 있어서 집을 나간 적이 있는데 어떻게 돌아왔는데도 아빠에게도 큰 상처가 됐고 저도 아빠가 상처가 너무 큰건 알겠는데 이걸 내가 해결할 수가 없는 걸 알겠어서 마음이 많이 무거웠었요. 근데 그걸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 삶에 무조건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됐어요.


빌라도의 증언

 

본문 성경절1 요18:28-40

 

빌라도 앞에 서시다(마 27:1-2,11-14;막 15:1-5;눅 23:1-5)

28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39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묵상1) 예수님에 대한 판결을 내린 총독 빌라도의 증언은 결국 무엇인가? (2가지)

 

무엇이냐면 예수님은 죄가 없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다.

 

심문을 할게 있어서 데려왔을 건데 심문을 계속 해봐도 이 사람에게서 죄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채찍질까지 했는데도 죄가 없을을 한번 더 알게 됐어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하는데 예수님이 그렇다고 하시면서 영적인 이야기로 끌고 가시죠. 빌라도는 이를 받아들였어요. 이걸 알 수 있는 대목이 18장 39절입니다. 그냥 유대인들에게 물어보는데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봅니다.

 

또 19장 14절에 보시면 ‘너희 왕’이라고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표현합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달리실 십자가의 죄패에도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게 하죠.

 

유대인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지만, 빌라도는 인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당시, 빌라도는 그 상황에서 정치적인 압력을 받는 상황이었는데도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증언을 하게 된겁니다. 또 빌라도는 뒤로 갈수록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묵상2) 자신의 증언과 다른 선택을 했던 빌라도. 그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행4:27 본디오 빌라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롬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믿음과 진심을 그 안에 담고)

 

<영감의 교훈> 빌라도의죄-"비록빌라도가예수의피값을고소하 는자들곧'그피를우리와우리자손에게돌릴지어다' 라고 부르짖던 군중들에게 돌렸다 할지라도 그가 무죄 한것은아니다.그도그리스도의피에대한죄가있다. 그는 이기적인 야망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의 치리자 로부터 받는 영예를 사랑했기 때문에 무죄한 사람을 죽 게했던것이다.만일빌라도가자신의양심을따라행 동했더라면 그는 예수를 정죄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 을 것이다"(초기 문집, 17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나보고 ‘주여주여’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 우리가 품성이 변화돼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그 사람의 삶을 움직이는 그 삶이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예배이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증을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로할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증언이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질문) 우리가 증언한대로 살아가는 방법은? 

말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기도를 해라

‘시험’해 보라고 하셨기 때문에.


 

도마의 증언

 

본문 성경절: 요20:19-31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2)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묵상1) 도마의 증언이 이와 같은 놀라운 신앙고백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28절 성경에 기록된 가장 놀라운 신앙 고백.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핵심기별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고백인데, 도마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다. 

 

<영감의 교훈> "도마는 자기 믿음의 조건을 요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분별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관대한 사랑과 이해심 으로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셨다. 불신은 언쟁으로는 거 의정복될수없다.그렇게하면도리어자기자신을변 호하고 새로운 구실과 핑계를 찾는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로 나 타내주면한때원치않던많은사람의입술에서'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한 도마의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808).

"그분은 겸손한 마음과 배 우고자 하는 정신으로 주의 깊이 살펴보아야 할 증거를 주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증명력을 보고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자신의 유한한 이해 력에분명히밝혀질수없는것들이약간있다는이유 로 설득력 있는 증거로부터 돌아서는 자는 불신과 의심 의차갑고냉랭한공기속에머물게되고,믿음의파선 을 당하게 될 것이다"(교회 증언 5권, 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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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3장 25-35 (침례, 메시아, 예수님 사역)

성경/요한복음|2024. 11. 1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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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 12:32)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따를 때 메시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적은 많은 이에게 믿음을 주었지만 어떤 이에게는 적대감을 가지게 했다. 침례 요한은 겸비한 증인으로 인간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예수께서 예언을 성취하시며, 의의 나라를 세우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군중들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따랐지만 많은 이들이 생각과 삶을 변화함으로 그분을 따르기를 거절했다.

1. 침례요한의 증언

 

본문 성경절 (요 3:25-30)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침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참고성경절

1) 막1:4-5

2) 호2:16-23

3) 사 62:1-5

 

묵상1) 요한의 제자들이 유대인과 더불어 논쟁한 ‘정결 예식’이란 무엇을 뜻할까?

침례이다. 그들은 침례가 진정으로 사람을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는지 안 해주는 지에 대해서 논쟁 한 것

침례를 성경에서 가장 먼저 베푼 사람은 누구죠? 침례요한입니다. 그런데, 마 3:15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침례에 대해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예수님께서 그 침례 의식을 승인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침례를 주지 않았을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침례를 줬다고 나와 있어요. 그럼, 왜 그 예수님께서 승인하신 침례를 직접 베푸시지 않으셨을까? 질문에 대해서는 아마도 어떤 사람도 예수님께 직접 침례를 받는 일로 교회 안에서 우월한 권위를 지녔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주석 내용이 있으니 참고!

 

묵상2) 요한과 요한의 제자들의 대화로 보아 참 예수의 증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읽었던 요3:25을 한번 다시 볼까요? 지금 ‘결례’ 곧 침례에 대해서 논쟁이 있는데 누가 논쟁을 먼저 일으킨건가요? (기다리고) 성경은 침례 요한의 제자가 먼저 논쟁을 일으켰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전 이야기가 뭐냐면 침례요한의 제자들이 침례의 원조는 우리들의 선생님인데, 저 예수라는 사람한테 사람들이 이제는 더 많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질투가 일어납니다. 또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뭔데, 침례를 자기가 직접 베풀지도 않고 자기 제자들을 시켜서 예식을 거행하게 하며, 우리는 침례를 베풀지도 못하는데 저 예수라는 사람의 제자들은 뭔데 침례를 베푸는 거야? 하면서 시기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기 스승님이 베풀었던 ‘침례’의식이 진짜로 사람을 거룩하게 하느냐?는 질문까지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이걸로 보아 아무리 침례요한처럼 엄숙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의 제자들일지라도 마음에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참 예수의 증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침례 요한은 마음이 조금 달랐던 듯 합니다. 30절을 한번 보실까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스승님, 저 사람들 잘못된거 아닌가요? 스승님이 원조인데 저 사람들 뭔가요? 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침례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건 침례요한이 자신의 영혼을 겸비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다시 증언하는 겁니다. 침례 요한은 제자들처럼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았어요.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영감의 글에서 찾을 수 있었어요. 이렇게 영혼을 겸비할 수 있었던 건 성경상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밤낮으로 연구했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바라보면서 자기자신에 대해서 잊어버렸다고 기록이 돼 있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가 지난주 방수봉사를 하면서 옥상에서 아름다운 구름과 경치들을 봤잖아요. 저는 그런 풍경들을 보면서 잠깐 ‘멍’하게 바라보게 되는데 약간 그런 거 아니었나 싶어요. 자기 자신과 너무나 다른 예수님의 모습과 품성을 말씀으로 분명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보게되면서 ‘자신’을 잊게 되는 경험을 하는 겁니다. 

 

<영감의 교훈을 읽어보겠습니다>

영감의 교훈

“침례 요한은 구주에게서 선지자 중 가장 크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그의 말과 십자가의 종들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의 말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침례 요한이 그리스도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주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주장한다. 제자들이 사람들의 주의가 새 선생에게로 향한다고 불평할 때, 요한은 그들에게 자신이 다만 약속하신 분의 선구자에 불과한 것으로 주장해 온 사실을 상기시켰다” (교회 증언 5권, 224).

 

질문) 어떻게하면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겸손에 대해 배울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데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봉사를 하고 힘들게 이곳 저곳을 거닐었다가 다 마치고 한 집에 들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적이 있으시죠. 그당시 문화가 이스라엘은 건조하고 흙먼지도 많은 곳이었고 사람들은 보통 맨발 또는 센들종류의 신발을 신었기 떄문에 발이 많이 더러웠어요. 그래서 부자집에서는 보통 ‘종’이 발을 씻겨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종이 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신의 제자들에게 베푸시는 겁니다. 그런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정말 ‘종의 종’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품성이 마음에 새겨지는 거고 나도 한번 따라해보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스키렌탈샾에서 숙식을 하면서 지내는 알바를 했었는데 숙소에서 밥을 먹으면 저랑 저보다 어린 동생들이 같이 있었는데 설거지를 잘 안했어요. 서로 미루다가 사장님의 형님인 부사장님에게 혼나면 보통 그 사람이 설거지를 했어요. 근데 진짜 설거지 하기 싫었던게 방도 추운데 뜨거운 물은 안나오고 진짜 찬물만 나옵니다. 그리고 밥그릇도 쐬그릇 있죠 교회 국 먹을 때 쓰는 쐬 그릇 딱 그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잘 안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맨날 저녁되면 점심+저녁 까지 먹었던 설거지가 쌓여 있는겁니다. 어느날도 마찬가지로 쌓여있었는데 사장님이 그걸 보셨어요. 저는 사장님이 그걸 보셨을 때, 괜히 딴척을 했는데 사장님께서 저희한테 뭐라고 화내실 줄 알았는데 팔을 걷으시더니 그걸 다 설거지 하시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가 저보다 높은 분이 설거지하는 그 모습에 진짜 내가 해야하는데 하면서 어쩔줄 몰라했던 그 경험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뒤로는 설거지 다했는데.. 아무튼, 나보다 높으신 분이 ‘낮아지시는 행동’을 하는 것을 직접 보게 될 때 겸손해질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메시야에 대한 새로운 이해

본문 성경절 (요3:32-36)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참고성경절: 사61:1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두안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묵상1)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묵상2) 요한은 언제 그 참의미를 알게 됐는가?

1과 2번을 같이 한번 설명을 해볼게요. 침례요한은 구별된 생활을 하면서 이사야서에 나온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정말 많이 묵상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 때 하늘에서 비둘기모양으로 성령이 내려왔고 하나님의 음성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직접 들었어요. 그것을 통해 침례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메시야 이신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침례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혼란이 있었어요.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를 했고 그가 생각했던 예수님의 사역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됐을 때, 예수님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서 뭐라고 합니까?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리이까’라고(참고성경저 누가복음 7:20) 했어요. 그 질문은 당신이 메이야가 맞습니까 아닙니까?가 아니라 당신의 사역이 대체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이었던 셈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냐면 침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가 사람들을 치료하고 병자들을 구제하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모습을 본 그대로 가서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참고성경절에 있는 사61:1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러니까, 그걸 전해 들은 침례요한은 자기가 이사야서를 연구했을 때 그 말씀을 당연히 알았을 테고 성경 말씀과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 병자들을 구제하고 자유를 주고 사랑을 베푸는 것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됐던 겁니다.

 

<영감의 교훈 읽기>

그러나 침례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들린 음성, 성령의 비둘기 같은 강림, 예수의 흠 없는 순결성, 그리고 요한이 구주 앞에 나갔을 때 그에게 임하였던 성령의 능력, 성경 예언들의 증언 등 이러한 모든 기억은 나사렛 예수가 약속된 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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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침례요한, 안드레, 빌립)

성경/요한복음|2024. 10. 26.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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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과 위 말씀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이는 우리가 거듭나야 반드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 첫번째 증인-침례 요한 (요1:19-23)

예수님이 오시기 전 침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증인이었습니다.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Q1) 침례요한의 사명은?

침례 요한의 사명은 분명했어요.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일!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인지 알게하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일이 곧 침례 요한의 사명이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곧바로 오시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Q2) 침례요한은 기별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했을까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듣기 싫은 말을 해야 했고 엄숙한 기별을 전해야 했기에 그는 철저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다. 우리는 지난주 목사님 설교를 통해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됐다. 그런데, 만약 그 목사님께서 설교단에서는 그렇게 훌륭한 모습을 보이셨는데 단에 내려오시자마자 정말 개차반의 모습을 보이신다면 우리에게 주어졌던 그 은혜는 분명 깨질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설교는 단에서부터가 아니라 단을 내려오면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죠. 침례요한도 그가 전했던 기별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려면 그의 삶으로 그의 기별이 사실이라는 걸 말해야 했어요.

 

  • 침례요한의 증언: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요1:29-33)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Q1) 요한은 어떻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 수 있었는가? 

침례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후에, 감옥에서 제자들을 통해 기별을 보낸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침례요한은 분명,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는데도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자 예수님께 기별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리이까?'하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침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고 돌려보내신다. 침례요한은 그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것이다

Q2) 침례요한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는 증언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사람들은 잘못된 관념 속에 잡혀 살았다. ‘메시야’에 대한 오해인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의 속박에서 살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에 의해 지배당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마치 우리나라의 광복과 같이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무력으로 구출해줄 한 영웅적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로마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 이었음. 그래서 사람들의 잘못된 관념속에 올바른 메시아관을 증언하는 일이었기에 중요했다!

*참고성경절

막10:45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롬5:6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벧전2:24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 두번째 증인 - 안드레, 사도요한 (요1:35-39)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Q1) 요한의 증언을 듣고 가장 먼저 예수님을 좇은 두 사람은 누구인가?

40절에 보면, 안드레 / 나머지 한명의 이름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요한의 서술 방식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글을 쓰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고 쓰는 것을 통해 요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성경절에 있는 요 21:24이 이를 뒷받침 하는 내용임.

Q2) 그들이 주님을 만나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

38-39절에 나와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서 말씀을 직접 들었고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우리가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법칙을 뛰어 넘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 직접 가보고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시는게 얼마나 은혜로운지를 경험하고서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오래 교제하며 시간을 나눌 때 우리는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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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예수님 올바로 이해하기! (말씀하나님, 성육신하신 하나님)

성경/요한복음|2024. 10. 20.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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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서론에서 예수님이 하나님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하나님, 태초에 계셨던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 등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어요. 이번주는 말씀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이시자 육신의 몸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님에 대한 주제로 살펴보아요.

 

본문성경절 요한복음 1:1-5

1 태초에1)말씀이 계시니라 이1)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2)깨닫지 못하더라

 

Q1) 요한은 요한복음 서론에서 지금 예수님에 관해 어떤 믿음을 선포하고 있나요?

Q2)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곧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을 해야 합니다. 어디에 그 근거가 있을까요?

빌2:4-5, 사9:6, 롬9:5, 요일5:20, 행20:28, 디도서 2:13, 히1:8, 시 45:6

 

빌2:5-6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롬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나셨으니1)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Q3) 우리가 찾은 성경절 3개 외에도 많은 구절들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성경을 올바로 믿기 위해서 중요합니다.

자,  돌아와서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로 인해 역사적으로도 많은 토론이 있었는데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라고 말을 하고 있어요! 

요1:14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4)진리가 충만하더라

Q1. 왜 굳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범죄한 시점부터 복음을 주셨어요. 지금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시면서 한 말씀이죠. 여기에는 ’여인의 후손‘이 나옵니다. 여인의 후손은 곧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이땅에 오신다는 예언을 이루기 위해 육신의 몸으로 오신겁니다.

우리 요한복음 1장 14절 한번 다시 볼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이 여기서 ’거하시매‘라고 사용한 단어의 의미가 ’천막을 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천막인 성소를 통해 인간을 만나고자 했던 그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데 곧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성육신하심으로써 인간들과 가깝게 접촉하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가리셨어요.

빌립보서 2장 7절에도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비우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고 말씀하여 이 영감의 교훈 내용을 증거하고 있어요.

요1:9-13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3)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Q1. 12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마저도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뭐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겼지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사건 후에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하니까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말이 내가 곧 하나님다 라는 의미였거든요.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갔다는 건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지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침례요한도 이 사실을 말했어요. 침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요한복음 3:31-32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자가 없었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화요일 소지 <교훈>의 내용을 누가 읽어주실 수 있나요?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지 혹은 거부하는 지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주어진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의해 시작된다.

 

-->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지 혹은 거부하는지 시작된다는 의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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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6장 예수님의 부활은 정말 사실일까?

성경/마가복음|2024. 10. 14.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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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부활은 우리가 믿는 신앙에서 왜 중요할까요?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막 16:6)

 

우리는 지난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기시게 된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아까, 우리가 부활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봤는데 저도 고백하면 부활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사실 많이 없습니다. 

 

예전 교회에서 같이 축구하면서 지냈던 동생네 아버지가 집사님이셨는데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면서 장례식에 참석하게 됐을 때 그렇게 좋은분이 돌아가시다니 슬프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어렴풋하게나마 부활에 대한 소망을 잠깐 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때 말씀드렸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은 있어서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되는 듯 합니다.

 

근데, 요즘 더 느끼는 것이 이제 점점 부모님께서 나이가 들어가시는데 사람의 ‘죽음’은 피할 수가 없기에 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내가 얼마나 슬플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제가 확실하게 믿고있지는 못하지만 ‘부활’이 있기 때문에 정말 작은 소망이라도 갖게 되는 것 같아서 감사한 것 같습니다. 제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엄청 없는데 이것과는 별개로 ‘부활’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근간이 되기에 무척 중요한 주제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다“고 말씀했습니다.

저처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아직 없는 분들은 그래도 오늘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부활’을 알고 또 부활을 믿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안에서 잠들 수 있도록 전심으로 기도하길 바라겠습니다!

제 16 장

살아나시다 


1
안식일이 지나매막달라마리아와야고보의 어머니마리아와 또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1)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나사렛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Q1.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언제였습니까?

안식후 첫 날이기에 일요일 아침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사복음서에서는 이들이 해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갔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날 미명에 일어났다고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그 날을 안식일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을 의미있게 당연히 생각해야 하지만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다는 근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신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날을 예배일로 지키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Q2.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골로새서 2장 12절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침례예식을 통해서 부활을 기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침례의 의미가 물속에 잠김으로 인해서 완전히 몸 전체가 죽은 상태였다가 다시 일으켜지면서 새 생명을 얻는다 곧 부활했다는 의미인데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기념하는 방법은 침례의 행위도 그렇겠지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안에서 거듭나는 경험입니다. 나의 죄로 인해 죽으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성령의 침례를 통해 나의 그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지어주셨다는 믿음을 갖고 그때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 진정 부활을 기념하는 방법

 

 

Q3. (교과 적용질문)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들에게 인생을 뒤바꿀만한 사건이 되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요일 본문에서 찾아볼까요?

 

6절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보시면 청년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면서 말로만 하지 않고 무엇이라 합니까? 와서 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를 직접 보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이 여인들은 이것을 보고 뭘 했을까요? 마태보음 28장 8절 “그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을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려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여인들이 슬픈마음으로 예수님의 시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아 누가 이 큰돌을 굴려주면 좋을텐데.. 그런데, 한 청년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직접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이제 믿음가운데 기뻐하며 그 소식을 전하러 가는 겁니다.

 

즉, 우리들도 부활을 성경상의 이야기로만 치부하지말고 개인 스스로가 성경과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를 찾을 때 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부활’이 나에게 산 소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월 돌이 굴려져 있는데

 

7가서 그의 제자들과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정리: 다른 복음서를 참조해서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한 소식을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돼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했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말하고자 말을 아꼈다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합니다.>

 

Q1.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로마서 1장 4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만약,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정말 4대 성인으로만 남으셨을 수도 있다는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셧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겁니다. 그래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Q2. 아까 학습목표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이나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일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우선, 역사로 기록에 남으려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증거를 과학적 입증 방법을 거쳐서 역사로 기록에 남게 됩니다. 그런일을 하는 사람들을 역사학자라고 하는데

 

토마스 아놀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가장 잘 증명된 사실이다”고 이야기했어요. 역사학자인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이 가장 잘 증명된 사실이다고 말했어요. 학자들이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이야기로만 치부될 것이 아닌 역사적 사실이라는 겁니다.

 

역사학자들보다도 더 증거중심주의 자들이 법관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국의 애드워드 클락 이라는 대법원 판사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법률적으로 검토했어요. 법률 재판 때의 사건을 다루듯 증거와 자료들로 검토를 한겁니다. 그리고 뭐라고 했냐면 “내가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확증적이다. 내가 대법원에서 많은 판결을 내려봤는데 이렇게 확고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신실한 증거는 항상 꾸밈이 없고 결과에 개의치 않는다(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법률가로서 복음서의 증거를 받아들인다. 부활은 사실이다”고 말했어요.

 

저널리스트들도 엄청 비판적인데,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저널리스트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참 비판하기 좋은 사건인 듯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볼 겁니다. 프랭크 모리슨이라는 저널리스트는 사람들이 바보같이 믿는 예수님의 부활을 오류로 도출하기 위해서 저널리즘의 열정을 갖고 그 사건을 파헤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신화일 뿐이다 면서요.

깊게 파헤치고 파헤치고 그 결과를 책으로 썼습니다. 그 책은 결과적으로 부활의 허구성이 아닌 부활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책이 되버렸습니다. 그 책이 바로 ‘누가 돌을 옮겼는가’하는 책인데, 부활에 관한 아주 고전적인 변증서로 남게 됐습니다.

 

최근에도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이 일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요. 리스트로벤이라는 사람인데 미국 ‘시카고 트리뷴지’에서 근무했던 사람인데 유명한 신문사인데 그 사람도 그것을 파헤치는 겁니다. 그 사람의 동기는 아내였습니다. 자신이 유명한 신문사의 저널리스트인데, 심지어 법률을 전공해서 과학적인 증거들과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인데 자신의 아내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미신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 사람은 철저한 무신론자였어요. 발품을 팔면서 몇 년동안 최고의 석학들을 만나고 다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오류로 입증하기 위해서요. 다년간의 연구가 마치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버렸습니다. 이 책이 편찬됐고 우리나라에서 영화로도 개봉됐습니다. 영화제목 아시나요? “예수는 역사다” 실제 자기 일대기를 영화로 만든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무덤을 찾은 그 여인들처럼 그 증거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깨져버리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 4가지

 

  1.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

눅24:3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반론1: 죽지 않고 혼절했다가 깨어나고 무덤을 탈출했다.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몸이 찢겨졌고 과다출혈 상태였고 극히 안좋은 몸상태로 6시간정도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고 거의 다 죽은 상태로. 창으로 심장을 관통했을 때 물과 피가 분리돼 나왔고 이건 찾아보니까 심장이 펌프질을 멈췄기 때문에. 사망선고를 받고 빌라도 총독이 재차 확인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는지. 그런데, 그 상태로 살아있다고 해도 의료 조치 없이 그 차가운 돌무덤에서 30시간이상 갇혀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살아 있더라도 그 바위를 굴려내고 밖에는 누가 있나요? 영화에서는 2명인데, 로마 군사 100인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파수꾼이 100인대였기 때문에. 당국자들이 두려워서 시체가 사라지는 것을 막고자 그렇게 배치한겁니다.

 

반론2: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

제자들은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훔쳐갔다는건 말이 안되기에

반론3: 당국자들이 시체를 숨겼다

 

그래서 시체가 사라진 것은 부활밖에 증거가 없다.

 

2. 예수님의 수의가 정리돼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게 아니라면 탈출했다면 그 급박한 상황에서 수의를 정리하셨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부활하신 분이 정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역사적 사실.

 

3.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다수였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서로다른 부활사건이 10건이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 여 제자들, 베드로, 엠마도 2제자, 다락방 10제자, 도마, 갈릴리 산에 모여서 예수님을 본 500여명의 성도들, 주의 형제 야고보, 갈릴리 호수에 갔던 사도들, 승천하실 때 감람산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목격자라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허상을 본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데 동시에 한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목격자가 있는 것이 그 주장에 대한 반박이 됩니다.

 

4. 제자들

 

사도행전 4장 18-20절 누가 읽어주세요!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산헤드린이 야 니네 예수님 이야기하지마라 죽는다 이럽니다.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의 말을 듣는게 나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게 많은지 판단해봐라. 우리는 보고 들은 걸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쫄아서 도망가고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 너 예수님이랑 같이 다녔던 사람 아니야 하니까? 난 모릅니다 하면서 3번이나 부인했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당당하게 산헤드린에 맞서는 겁니다.

 

마지막 증거는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사건을 기준으로 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후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어요.

 

예수님의 부활 전에는 서로 다투고 교만하고 폭도들에게 예수님을 내어주고 도망가고 

믿음없는 모습을 보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이후,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고 끓는 어떤 사람은 칼에 목이 잘리고 어떤 사람은 끓는 물에 몸이 던져졌습니다. 십자가 사건처럼 예수님 부인하고 도망가면 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이 바뀌기가 정말 어려운데 어떻게까지 제자들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예수님의 부활말고는 다른 이유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도 성경상의 이야기로만 부활을 이야기하지말고 부활을 나의 삶에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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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5장 1-32절 빌라도, 구레네 시몬, 십자가

성경/마가복음|2024. 10. 1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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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구시에 예수께서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15:34)

서론: 마가복음 15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마가복음 후반부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15장은 그 중심입니다.

  • 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막 15장1-15읽기)

1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빌라도가 묻되 네가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6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요약: 대제사장들과 장로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빌라도라는 로마 총독에게 넘겨줍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그리고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총독의 역할은 

  • 총독은 조세 업무 감독.
  • 중요한 경우에는 재판관으로 활동.-사형 판결을 내리고 집행하게 하는 것도 총독의 권한
  • 총독은 또한 군대를 통솔

 

Q1. 빌라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15:1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는 일을 예수께 고하니 (눅13:1)’라는 말씀으로 보아 빌라도는 언제라도 사람들을 쉽게 죽이는 사람이자 폭력적으로 다스렸다는 의미입니다. 군대가 성전까지 들어와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을 쳐 죽인 일이 있었다는 의미.

 

15장 1절에 보면 산헤드린은 언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러 갑니까? 네 맞습니다. 새벽부터 갑니다. 왜 새벽부터 갔을까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마가복음 14장을 연구했는데 막14:2에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지 않기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합의를 봤습니다. 만약,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면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지지난 시간에 영상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았어요. 예수님이 입성을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만약, 적법절차에 따라 예수님을 심문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다면 분명, 민중이 난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엄청 신경 쓴 지도자들은 ‘새벽’에 불법적인 절차에 따라 그 일을 처리하길 원했고 급했음. 그래서 으레히 사형선고를 내려주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감

 

Q3. 질문입니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을 넘겨받고 갑자기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나 –15:2

 

마가복음에 많이 생략이 돼 있어서 그럽니다. 요한복음을 보니까 18장 29절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끌고온 사람들에게 묻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가 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그랬더니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이 예수가 흉악한 죄인이니까 데려왔지 그냥 데려왔겠어 빨리 사형시켜! 라고 하는겁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의 입장에서는 평상시 빌라도가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 다루듯 쉽게 다루었고 사형선고도 잘 시켰기에 새벽부터 예수님을 빨리 사형시켰으면 좋겠어서 데려온건데 갑자기 ”이 사람을 왜 죽이려고 하는지“ 물어보는 겁니다. 그래서 쥐어 짜내서 위증을 한 내용이 뭐냐면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했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했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누가복음 23장 2절. 그래서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예수님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종합해보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에게 빨리 사형집행되기를 바라고 빌라도를 찾아왔습니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누군가를 사형집행시킬 권한이 없었어요. 그래서 로마 총독 이자 빌라도를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 목숨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또 질문입니다. 평상시에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쉽게 내리던 빌라도는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왜 죽이려고 하는지 물어봤을까요?

 

그가 예수님을 대면하고 그가 지금까지 봤던 사람들과 달리 너무나 고결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죄인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봤던 겁니다.

Q4. 왜 예수님께서는 허위 고소로 인한 총독의 심문에 대해서 ”네 말이 옳도다“라고 하셨을까 –15:2

예수님은 자신의 앞에 선 빌라도가 예수님 자신에게 영적으로 끌리는 것을 아셨다. 비록,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옳도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자신을 끌고온 사람들이 옳다구나 싶어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 짐작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과 죽음보다 중요한 것이 앞에 있는 ‘영혼’ 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진리를 제시하신 겁니다. 

 

Q.5. 왜 빌라도 총독은 정치적 압박과 빗발치는 고소에도 그분을 살리려고 명절의 전례까지 이용하며 그토록 애를 썼는가? 빌라도라는 인물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살리려고 했습니다. 

-전체내용

빌라도 앞에서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상상해봅시다. 빌라도와 대면하시는 뒤편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악에 받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압박하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란스럽고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기 방어를 하려고 움직이기 마련인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자기 변호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아도 화도 내지 않으십니다. 빌라도는 많은 심문의 경험을  통해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분에 대한 존경과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들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시대의 소망에는 ‘조롱의 표시인 자줏빛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쓰고 서 있는 그분이 하나님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써있습니다. 그리고 그 빌라도의 아내의 서신에도 ‘그를 해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많이 생략이 돼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계속 살리려고 거의 10번에 가까이 거듭거듭 노력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심지어 명절의 전례를 이용하면서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나,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우리가 빌라도를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무너진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4:27에 빌라도를 ”이방인과 헤롯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 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헤롯과 같이 그도 예수님을 거스르고 죽인 악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읽었던 성경절에서 찾아봅시다>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라고 나와있습니다.

빌라도는 그간의 심문 경험으로 그리고 양심을 통해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확신대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끌고온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위치가 압박을 받게 될까봐 (이건 그가 이전에 행했던 악한 일로 인해 황제에 의해 자리를 잃게 되는 이유) 양측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무리의 만족을 주는 선택을 하게 된겁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칠까봐 그 악의 편에 섭니다. 그렇게 타협함으로써 양심을 거스르게 되는 겁니다. 즉, 내가 어떤거 하나라도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사망의 길이 됩니다. <디모데전서 1:19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Q. 나의 무지로 인해 잘못한 적은 없었나요? 무지라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까 무지도 잘못이라고 느꼈던 적은?

  • 막15:15-20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경례하여 이르되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 요약: 빌라도가 무리가 너무 들끓자 이제 예수님을 군인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브라이도리온’이라고 나와있는 곳이 있는데 여기는 ‘병영’이라고 보시면 될듯합니다. 병영이란 군인들이 주둔하는 건물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조롱을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수치와 폭행을 당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오시기 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새벽 전 밤에 끌려가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수치를 당하시고 폭행을 당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빌라도의 집무처에 있던 군대는 이방사람들이었고 대제사장 가야바가 있었던 곳에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였지만 똑같이 예수님을 폭행했다는 사실이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똑 같은셨는데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죄나 이방인의 죄나 다 짊어지고 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구분없이 책임지시겠다는 의미. 그들 모두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 모두에게 용서의 길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에서 반복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이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냐?‘ 이로써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월 영감의 교훈 읽기>

 

화 십자가  

 

성경구절:막15:21-32

 

21 마침알렉산더와루포의 아버지인구레네사람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예수를 끌고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그 위에 있는 죄패에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1)(없음)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Q1. 왜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했는가

 

십자가의 실제 무게는 59kg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갈 수 없고 졸도하시니까 대신 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보면 로마 군인들이 피지컬이 상당합니다. 실제로도 그랬을텐데 왜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지지 않았을까요? 십자가 형벌은 고대 로마의 사형 방법 가운데 하나인데 가장 굴욕적인 처형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앞에서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많은 예술작품에서는 예수님의 중요 부분에 옷이 있는 그림을 우리가 접하게 되는데 요한복음 19장 23절을 보면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옥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라고 나와있습니다. 즉, 십자가형을 받게되면 나체로 십자가에 달리게 되며 굴욕과 수치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형이 가장 악명 높은 형이었던 이유는 화형이나 팽형 등도 고통스럽지만 그것들은 고통의 순간이 짧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최대한 죽지않게 인간의 정신적 한계를 체감시키고 숨을 끊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에 보면 십자가 형을 소개한 영상이 있는데 거기 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십자가형은 죽음의 모든 차원을 경험한 후에 죽게된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다시말하면 십자가는 굴욕의 상징이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신으로라도’ 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군병들도 대신지지 않았고 옆에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라는 이유로지지 않았죠. 핑계를 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구레네 사람 시므온이 예수님을 측은하게 보고 동정으로 바라보니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겁니다. 어찌보면 그가 강요에 의해 십자가를 졌다고 볼 수 있겠으나 성경 어디에도 그가 저항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동정했고 십자가를 대신 지기로 했다는 증거입니다. 21절에 보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구레네 사람 시므온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마각 기록한 이유는 알렉산더와 루포가 그의 동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시므온은 아들들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을 것으로 추정은 됩니다. 

 

한가지 더 알고가면 좋은 것은 시몬이 환경에 의해 십자가를 지게 됐지만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가는 과정이 예수님을 그가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14:27)’ 고 하셨습니다. 역사상 유일하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은 구레네 시몬이 유일무이했습니다. 그말은 곧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감으로써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는 겁니다. 이 행위 자체에서 시므온이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체험으로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그분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Q2. 몰약 탄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는?

십자가형이 무척 고통스럽기 때문에 몰약탄 포도주라도 줘서 약간의 진통제 같은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권하는데 이것은 관례입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라도 영적인 분별력을 흐리게 하는 것은 드시지 않았던 겁니다. 그 상황에서도 절제하시고 인내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이장면이 ‘몰약탄 포도주 대신 ’쓸개 탄 포도주‘라고 이 구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69편 21절의 예언의 성취인데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포도주‘가 결국 술일텐데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전쟁 중에 마취제나 진통제가 없을 때 술을 사용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잠언 23장 31-32절에 보면 “포도주를 보지도 말지어다”라고 하고 또 “이것이 마침내 뱉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다”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정신이 혼탁해져서 사탄에게 뱀 같이 물리고 독사같이 쏘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마심으로써 비록 약간의 진통효과는 있었겠지만 정신을 흐리게 해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되니 그것을 생각하고 거절하셨다로 보시면 됩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의인으로서 묵묵히 망치질을 믿음으로써 했고 방주의 구원을 경험했던 노아조차도 그 술 한잔으로 인해 패배를 당하게 됐습니다. 

 

Q3. 왜 이런 과정이 필요했을까?

Q4. (26절)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힌 죄패가 의미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복음서에 보니까 이 죄패를 많은 언어로 기록했다고 나와있습니다. 만국 공통어로 기록한 겁니다. 어디서 왔든 읽을 수 있게. 사실 이 죄패는 빌라도에 의해 이렇게 기록이 됐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적혀졌다고 영감의 글에 나와있습니다. 예수님의 죄패는 약간 최초의 전도지 같은 느낌이었던 듯 합니다. 전도지는 짧고 명료해야 하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야 하고 눈에 띄어야 하는데 이 죄패가 딱 그랬기 때문입니다. 

 

Q6. 왜 꼭 예수님의 좌우편에 2명이 있어야 했을까? 왜 그들은 2명이어야 했으며 좌우편에 있어야 했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지가의 위에 죄패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적혀있었을텐데 그것을 지러 갈 때 이 두강도가 함께 갔고 많은사람들이 그 죄패를 봤겠지만 누구도 봤다? 그 강도들도 봤다. 그런데, 그 죄패 즉,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고도 한 사람은 구원을 얻지만 다른 한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제 3의 선택지는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죄패라는 전도지를 보고도 어떤 사람은 왕으로 인정하거나 어떤 사람은 대적하거나 하는 겁니다. 

Q7.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에 주님이 끝까지 응하지 않으신 이유를 그 조롱 속에서 찾아보자.

(영감의 교훈)

 

 

 

 

 

 

 

 

 

 

 

 

댓글()

[마가복음] 마가복음 14장 향유 옥합 사건, 유다의 배신

성경/마가복음|2024. 9. 2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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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의 후반부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1-10장에 배치했고 11장부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및 십자가사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야 그렇다치고 마가복음 11장부터 16장까지 총 6장에 걸친 이야기가 펼쳐지는 실제 소요기간은 단 10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건의 전개가 느리고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처럼 마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는 사건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하는 겁니다. 오늘부터 나눌 마가복음 14장-끝인 16장 까지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심문 받으시는 내용을 살펴보는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붙잡히시게 됐는가, 그리고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제자들이 도망가는 내용 등이 나옵니다.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위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마셨어야 할 잔이 예수님도 감당하기 힘들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비록 이 잔을 마시기가 싫지만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라며 끝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기도로 마침표를 찍으시는 겁니다.

 

Q. 내가 받았던 선물 중에 가장 의미있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왜그렇습니까?

향유옥합 사건 (마가복음 14장1-11절)

  • 명절에 예수님을 죽이기 원치 않는 산헤드린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붓다

3 예수께서베다니나병환자시몬의 집에서1)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나드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2)데나리온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 유다의 배신

10열둘 중의 하나인가룟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지금 읽은 말씀을 3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을 것 같은데 한번 편하게 나눠보고 말씀해주실 분 있으실까요? 지금 읽은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면?

1-2 예수님을 잡으려는 계획

3-9 향유옥합 사건

10-11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내용

 

  • 이게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5번째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샌드위치란 빵과 빵사이에 치즈가 들어가는 것이고 우리가 이것을 빵 따로 치즈 따로 먹지 않는 것처럼 그 이야기를 한번에 같이 소화해야 의미가 깊고 이것은 마가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 어떤 이야기가 빵(전체)이 되고 어떤 이야기가 치즈(속) 이야기가 될까요?

 

제 제사장들과 서시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줘 예수님께서 결국 잡히시는 내용이 전체 (빵)이 됩니다. 그리고 향유옥합 사건이 치즈가 됩니다.

 

  • 향유옥합 사건은 혹시 언제 일어난 일일까요? 

네 지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는 유월절 몇일 전이냐면 이틀전입니다.

 

그런데, 향유옥합사건은 요한복음에 보니 ”유월절 엿새 전에...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예수님께 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은 유월절이 있기 이틀전에 시행된 것인데, 향유옥합 사건은 유월절 엿새전에 일어났던 사건인 겁니다. 

 

  •  그럼 마가는 왜 엿새전 이야기를 이틀전 이야기에 끼워놨을까요? 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내한테 이야기할 때 시차순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이야기를 다 들려줍니다. 

그럼 마가라는 인물은 왜 이 이야기를 샌드위치 구조로 만들었을까요? 

  •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됐던 것이 향유옥합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향유옥합 이야기를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옥합을 붓고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을 왜 300데나리온 이상의 값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느냐고 말을 합니다. 이 주동자가 누구였습니까?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지적하는 일을 오히려 칭찬해주시고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일을 기념하라고 하시니까 유다는 어떱니까? ‘책망을 느꼈고 자존심이 무척 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발이 어디로 나아가는 겁니까? ‘예수님을 따랐던 발걸음이 이제는 예수님을 팔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님이 붙잡히시는 이야기 가운데 향유옥합사건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이것을 이렇게 치즈로 배치한 것입니다.

 

  •  그런데, 이 이야기를 샌드위치 구조로 만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서 마태복음에보면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리우리라“ 예수님께서 지금 언제 자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고 있나요? 네 맞습니다. 유월절에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계신 겁니다. 자, 다시한번 마가복음 14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지도자들은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자고 합니까 안합니까? 안합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돌아가신다고 예언을 했는데 이렇게 되면 예언이 성취가 되지 않는데 어떤 사건을 통해서 그 예언이 성취가 됐다? 향유옥합 사건을 통해서 그 예언이 성취가 됐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마가가 의도를 갖고 이렇게 샌드위치구조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9절에서 ”저를 기념하라“고 하시면서 여인의 행위를 복음과 함께 영원히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4복음서를 살펴보면 어떤 이야기는 있는데 어떤 이야기는 이 복음서에 없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에 다 기록이 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것을 기념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드 향유는 지금도 인도에서 여자들의 머릿기름의 향유로 쓰이고 있다. 고대 유럽에서는 값비싼 향유로 즐겨썼습니다. 지금은 향이 너무 짙어서 향료로 쓰이지 않고, 신경 안정제로 사용하고 있다.

 

  • 데나리온의가치: 노동자의 하루품삯

지금 최저임금이 10,030원 이니까 일당으로 치면 하루 80,240원이다. 지금으로 치면 24,072,000원 정도!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는 연봉인 금액의 가치를 이 여인은 드렸다!

 

우선, 이 여인이 행한일은 자신의 의도를 갖고 행한 일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이 일을 행한겁니다. 성령께서 왜 그녀로 하여금 이 일을 하게 하셨냐면 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할 것인데, 그 중대한 일을 표상하게 하려고 그녀를 감동 시킨 것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면 1년치 노동자의 품삯이라고 합니다. 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그녀는 몽땅 다 드린겁니다.. 그 사건이 표상하는 것은 고귀하고 값진 향유 옥합이 사랑으로 인해 깨져서 그 방안을 향기로 가득 채운 것처럼 고귀하고 존귀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세상을 구원할 향기가 온 세상에 가득할 것이라는 표상인 겁니다. 

 

  •  교과 교훈에 보면 ‘예수님께 드린 여인의 선물은 주님을 배신한 유다의 비열함과 대조를 이룬다.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은 기억될 것이며 유다의 잘못도 후세가 기억할 것이다’고 나와 있는데 자, 유다를 한번 생각볼까요. 유다는 제자들 중의 재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다른 제자들과 달리 똑똑하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서열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 유다가 불만을 퍼뜨리거나 해도 다른 제자들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훌륭한 인물이니까. 그리고 향유옥합을 부었을 때 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느냐고 말하도록 주동한 사람도 유다였습니다. 자, 그런데, 유다가 지적한 행동을 예수님께서는 기념하라고 하셨으니 유다가 무척 책망을 받고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파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람이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적대하는 쪽에 서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A. 성령의 책망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 회개하라는 성령의 강권이 들릴 때 순종하지 않고 뻣뻣하게 버티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다처럼 성령의 책망이 들리게될 때 쉽게 이성을 잃게 되는 듯합니다. 

 

<예화: 어떤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회개하라’가 주제였습니다. 설교가 마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소집됐고 회개하라는 설교는 나이많은 목사님이 해야 한다고 말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의견을 제시한 분이 한 장로님이었는데 대쟁투 총서를 여러번 필사하셨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고 교회안에서도 꽤 존경을 받았던 분인 것 같습니다. 사실, 대쟁투 총서는 자존심을 세우기보다는 자존심이 무너지는 사랑의 권고들이 많아서 그것을 여러번 읽고 필사한다면 영성이 더 깊어지게 될 텐데. 젊은 목사가 회개하라는 설교를 했을 때 그분에게 그것이 상처가 됐나 봅니다.

 

묵상: 유다가 진짜 가식적인게 향유 옥합을 부은 여인에게는 사람들에게서 꼽을 주다 못해 진짜 개망신을 주려고 작정하면서 그 옥합을 300데나리온 이상의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다.. 어쩌면, 가룟유다의 그 모습을 통해 그가 모든 것에 계산적이며 세속적 가치로 환원하는 사람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영적인 가치를 보시며 마음을 봐주신다..

그 사실이 감사하다.

 

 

최후의 만찬 (마가복음 14장 12-21절)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1)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요약: 제자들이 예수님께 유월절에 어디서 유월절 음식을 먹기 원하시는지 여쭤본다 --> “성내로 들어가라 가면 물 한동이를 이고가는 사람들 만날 것이다 ” -->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객실이 어디있느냐“ --> 그렇게 하고 날이 저물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잡수심 -->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려고 한다.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Q. 하나님께 약속했다가 무슨 이유로든 결국 그것을 지키지 못했던 경험은? 그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배반 예언 (마가복음 14장 22-31절)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언하시다(마 26:31-35; 눅 22:31-34; 요 13:36-38)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3)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ㄱ)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4)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22-26 마지막 만찬: 유월절에 만찬을 먹는 이유는? 

 

25 –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에서 포도나무 열매 중 새것을 마시겠다고 하시고 다시는 이땅에서 마시지 않겠다고 하셧을까. 이 의미가 무엇일까

 

Q. 왜 주님은 만찬 가운데 떡과 포도즙으로 새로운 기념일을 제정하셨는가?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유월절은 이제 폐하여질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림자가 아닌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롭게 재정하신 기념일은 유월절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매 식사 때마다 할 수 있는 겁니다. 유월절은 1년에 한번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새롭게 재정하신 기념일은 빈도수가 더 많아지는 겁니다. 우리 교단 중 교회마다 다르겠지만 성만찬 예식을 1년에 1-2번 하는 교회가 많은 듯 합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매일 모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예찬을 나눴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매 식사 때마다 그분의 사랑과 죽음을 기억할 수 있도록 이 제도를 만드신 겁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1장 25절에보면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으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떡과 포도즙을 마실 때마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꼭 떡과 포도즙이 아니더라도 식사는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니까 그때마다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을 기념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영생을 위해 내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음으로써 그 생명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갈바리의 십자가 사랑을 기념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이 예식을 제정하셨다. 우리가 우리를 짓누르는 죄와 고통 또 교만 등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고 예수님안에서 자유와 평강과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제정하셨다. 

 

Q.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즙을 먹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셨는가? 제자들은 그날까지 먹으라고 하시고선 예수님은 왜 포도즙을 먹지 않겠다고 하시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초점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위로의 말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사실에 그리고 예수님과의 마지막 식사자리라는 사실에 슬펐을 것이다. 작별의 마지막 식사였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위로이자 서약을 하신 겁니다. ‘내가 다시 오는 날 그때 너희와 함께 먹겠다. 내가 그때까지는 다시 먹지 않겠다. 내가 빨리 오겠다’.. 그 말씀으로 제자들은 위로를 받았고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 없는 그 자리에서도 만찬을 가지시면서 이게 예수님의 살과 피야.. 그때 예수님이 그랬지 주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까지 다시다시지 않는다고 하셨어.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하셨던 겁니다. 

 

Q. 그분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를 마치신 뒤 함께 부른 찬미는 어떤 찬양이었는가? 

시편 117편에 보면 유월절 찬야이 있는데 그때 배정된 유월절 찬양을 그냥 부르신 겁니다. 내용이 되게 힘차고 희망찬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죽으러 가실 때 슬퍼하지 않으시고 즐거워하는 창송을 부르셨다. 

 

<시편 117편에는 유월절 찬양이 어떠한지 나와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ㅊ칭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모본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모습이 뭐가 있을까.. 그리스도인 즉 복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슬픔의 때에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삶에 먹구름이 왔을 때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입술에 찬양이 있어야 한다. 왜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시고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주는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것이니까요. 우리가 근심과 두려움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 주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술에 찬양을 갖고 살아가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하고 멋진 그리스도인이다. 쨍이쨍이 멋쨍이

 

Q. (막14:27-31 베드로 및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을 예언하심) 제자들이 그분을 버리겠지만 그분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에 대해 주님의 예언에 대해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 그래도 찬양하기

 

<29절에 보면 베드로가 그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외에도 제자들은 기분이 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버려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기분이 상했을까요? 네 자기들이 연약한걸 모르고 자기 과신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속 이야기 했는데 ‘아 예수님은 나를 뭘로 보시는 거야’라고 생각했겠죠. 우리가 여기서 가져야할 교훈은 ‘자기 자신이 연약하다’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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