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첫 성전, 두번째 성전

성경/말씀 묵상|2024. 4. 4. 11:09

예루살렘의 첫 성전은 그 외관의 아름다움이 상당했다. 그러나, 솔로몬이 완성했던 첫 성전은 파괴됐다. 그리고 뒤이어 완성된 두번째 성전은 그 외관이 첫 성전보다 못했다. 사람들은 첫 성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광스럽지 못한 두번째 성전을 보고 울었다. 그러나, 두번째 성전은 영광스러울 것이라고 약속됐다. 그리고 두번째 성전이 더욱 영광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그곳을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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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로마서 8장 18-25절

성경/로마서|2024. 3. 27. 10:55

롬8장 18-25절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18 –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었을까

사도바울은 유대인들과 로마당국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다. 또 바울은 ‘나타날’이라는 표현으로 미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확실히 일어날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갈라디아서 3:23도 같은 표현이 사용됐다. 그리스도인들은 요일3:2의 말씀처럼 그의 계신 그대로 볼 때 그분과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거울처럼 그분의 모습을 반사할 것이다. 그리고 곧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돼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를 것이다. 이렇게 영광스러움이 ‘나타날’ 미래에는 하늘나라의 아름다움과 광채, 하나님의 보좌 등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장소들도 포함된다. 이렇듯 미래의 영광스러운 ‘영원한 영광’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땅에서의 ‘고통’에서 붙들어준다. 이 고난이 비록 크게 보일 수 있지만 우리가 받을 영광은 영원하고 중한 것이다. 고통의 경하고 순간적인 부분과 비교된다.

 

19 – 피조물? 하나님의 아들들? 

이 구절의 의미는 큰 논란거리였다. 그러나 인간이냐 아니면 모든 창조물이냐하는 논쟁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데 그 인간이 타락한 후 다른 모든 창조물도 악에 영향을 받아 훼손됐다. 따라서 이 구절은 구원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창조물을 회복시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자녀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인간과 다른 모든 창조물이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피조물도 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회복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그 회복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0 – 허무한 데는 하나님과 다른 성질의 의미같은데 허무한 데 굴복하는게 ‘굴복하게 하시는 이’라고 표현을 했다.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쪽에 가는 편이 허무하다는 의미인가?

 

인간의 타락은 피조물의 타락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회복하는 그날 피조물도 썩지 않게 될 것이다.

 

21 – 영광의 자유

22 -

23 –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나리’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처음 익은 열매’는 성령의 거듭남을 경험한 성도가 몸의 부활도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인한 모든 선물을 가리킨다.

 

24 -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구원을 바라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소망을 하게 하는 원동력은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매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는 같은 의미가 된다. 한편,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표현에 에소데멘’은 과거시제이다. 성도가 구원을 얻은 것이 이미 종결됐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소망으로’ 라는 표현이 ‘18절과 21절 그리고 23절 등에 ’나타날 영광‘ , ’영광의 자유에 이르느니라‘ ,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등의 미래적 개념을 지닌 단어와 대조된다. 그래도 모순된 설명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거듭남을 통해 구원을 얻은 자이지만 동시에 구원이 장차 미래에 이뤄질 일에 대한 소망이기에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 계속 굳건해지고 견고해짐을 의미한다. 즉, 거듭남을 경험한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구너속의 반열에 들어섰음과 동시에 장차 임하실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것이다. 

  

25 - ‘보지 못하는 것’은 구원인가. 하나님의 구원을 참음으로 기다린다고 한 표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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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5편] 시편 15편 묵상

성경/시편|2024. 3. 21. 10:50

시편15편

  1. 여호와여 주의 성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5.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Q1절: 주의 성막, 주의 성산은 거룩한 장소에 누가 설 수 있을까?라는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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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2편] 시편 122편 1~9절

성경/시편|2024. 3. 14. 10:40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Q. 저자가 말하는 '여호와의 집'은 어디일까?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Q.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전체를 말하는 것일까?

3.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 되었도다

Q. 여기서 말하는 '조밀한'의 의미는 무엇일까? 견고한 성읍이라는 의미인가?

->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 성전주변으로 도시의 건물들이 빼곡함을 알수 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조밀한'이라고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Q. '그리'가 어디인가하면, 여호와의 집인듯 한데 '시온산'인가? 아니면, 주님의 성소가 있는 곳인가? 

5.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Q. 1.4.5절이 이어지고 있는듯 보인다. '판단의 보좌'라면 하나님꼐서 계신 성소인가?

-> 예루살렘이 정치적 중심지였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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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4편] 시편 84편 1~12절

성경/시편|2024. 3. 10. 21:48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ㅎ나이다

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7.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제엑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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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편]

성경/시편|2024. 2. 22. 11:04

1. 행위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법을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

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Q. 여호와의 증거란? 

3.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않고 주의 도를 행하는 도다

Q. 여기서 '저희'는 누구일까?

4. 주꼐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Q. 근실히의 의미는?

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않구나. 하나님앞에도 그렇겠지? 하나님앞에 완전히 부끄럽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건데 내가 성실하게 지킨다면 최소한 덜 부끄럽지않을까싶다.

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라면.. 죄와 의를 판단하는 그 판단이실까?

8.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사람이 율례를 지킬 수 없을텐데 어떤 의미일까? 이 사람도 그것을 알았을텐데 무엇을 의도했는지 궁금하다. 결심일까?

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때 그 말씀에 따라 행실을 가져가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스도인 청년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행실을 삼가는 사람이다.

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2.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율례를 문자적으로 모르지 않았을 터, 어떤 것을 가르쳐달라고 했을까? 왜 이런 율례를 주셨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달라고했을까?

13. 주의 입이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Q. 규례의 의미는?

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그리스도인이 재물을 즐거워해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재물을 받았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일까

16. 하나님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무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이 율례가 속박이 아니요 즐거움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주셨는지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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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1장, 2장, 9장] 이방문화에서의 선교, 부림절

성경|2023. 12. 24. 00:36

이방문화에서의 다니엘과 세친구

 

유대인들은 신앙의 원칙을 지키기가 쉬웠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세한 신앙의 원칙들이 그 나라의 법으로 제정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생각을 해보면 만약 안식일이 국가에서 지켜야할 신앙의 원칙으로써 법으로 제장돼 있었다면 직장을 두고 씨름하거나 시험을 두고 고민하지 않아도 됐을듯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법으로 정해져 있었더라도 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도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경고이 기별을 보내시고 다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서해주시는 이야기의 반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를두고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뿐이라 (사 29:13)

'내게서 마음이 떠났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입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일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근거리에 두는 일인 듯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죄와 파멸이 반드시 뒤따랐습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는 나라가 점령당해 다른 나라에 끌려가 살게 됐습니다. 어찌보면 이스라엘에서 신앙을 지키던 것보다 덜 지켜도 혹은 안지켜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대로 다니엘은 뜻을 정해 자기의 몸을 더럽히길 원치 않아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았습니다. 또 세 친구는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으며 다니엘은 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 금지된 환경에서도 하루 3번 기도했습니다.

 

이 예화들은 이방의 문화속에서도 마음의 내면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말씀에 충실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신앙이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계속 향하도록 사람의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이방문화속에서 살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신실하게 보여줬던 사람으로 '요셉'도 있습니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보는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어찌 하나님앞에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하며 코람데오의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책에는 그가 성적으로 타락한 애굽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의 주위에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숱한 죄악들이 둘러 있었으나 요셉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생애하였다. 그의 생각은 금지된 문제들의 주변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애굽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욕망으로 자기의 원칙을 감추는 일도 없었다. 그가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요셉은 마음으로 항상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방 문화 가운데서도 신실함을 잘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방문화에서의 에스더-모르드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이후, 메대 페르시아라는 국가가 세워졌고 유대인들은 고향 땅으로 귀향했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여전히 이방 땅에 남아있었습니다. 그 중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살고 있었고 모르드개라는 사람은 왕실 관리로 일을했습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사촌이자 입양했던 수양 딸이었다고 합니다.

에스더 1장에 보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했던 왕은 아하수에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이 왕비블 탐탁치 않아합니다. 왕비는 와스디라는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왕의 총애를 잃어버렸고 왕은 이에 종들을 전국 각도에 보내 왕비를 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에스더도 왕궁으로 오게 됐습니다.

네. 에스더가 왕궁으로 왔고 궁녀를 관리하는 헤개라는 사람에게 선택을 받았는데 이후에도 자신이 유대인임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아무래도 종족과 민족을 바로 고했다면 페르시아의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에의해 적대적인 환경에 노출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침묵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Q. 신앙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떄는 어떤 경우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신앙인으로서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까요?

에스더 당시 페르시아의 왕은 아까 말씀드린대로 아하수에로 왕이었습니다. 에스더 3장에보면 이 아하수에로왕이 '하만'이라는 사람에게 큰 권력을 주게 됩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하만 앞에 나와 무릎꿇고 절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던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만'이라는 인물이 출애굽 이래 적이었던 '아말렉 사람'이었던 '아각'의 후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은 당연히 죄인인 인간을 당연히 숭배하지 않았겠지요.

 

마치, 다니엘의 세친구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아 풀무불에 던져졌던 것처럼 모르드개에게도 큰 시련이 닥칩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는 자신들에게만 임한 시련었는데 모르드개에게는 모든 유대인의 사활이 걸린 시험이 닥치게 됐습니다. 곧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반포됐습니다.

이제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있고 모르드개는 옷을 찢으며 슬퍼합니다. 이 시기에 에스더는 아하수에로왕의 왕비가 됐습니다. 모르드개는 이제 에스더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네가 왕후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누가 그걸 알겠느냐고 말합니다. 이에, 당시 페르시아법으로는 사전에 왕에게 말하지 않고 왕앞에 나아가면 죽는 법이 있었음에도 에스더는 "온 유대인에게 나를 위해 3일간 금식하고 기도해줄것을 구했고 자기도 3일간 기도 후에 왕앞에 나아갈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섭리로 제비 뽑기로(부르) 온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던 하만이 도리어 죽게 됐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이날을 부림절로 기념하고 있다. 여기서 '부림'은 히브리어 푸림인데, '푸림'이라는 단어는 '제비뽑다'는 의미인 '푸르'의 복수어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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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사사기3장 1-6절 <시돈, 블레셋, 가나안 후기 원주민>

성경/사사기|2023. 12. 11. 08:30

1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Q. 가나안 전쟁, 왜 그들을 시험하려 하셨던 것일까?

*사사기 1,2장은 출애굽 제 2세대인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기를 간추려 놓았다. 1세대는 광야에서 죽었고 2세대는 광야에서 출생해 가나안 정복사업에 가담했다.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Q. 그들이 왜 전쟁을 알아야 했을까? 남겨두신 열국?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과 함께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들어섰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성들을 위해 베푸신 위대한 구원에 관해 개인적인 경험이 없었다. 이 세대는 안락함 가운데 성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대 국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주변 민족들을 통해 과거 세대의 교훈 즉, 이방 신들의 무능력함과 위대한 구원을 그들이 알기 원하셨다. 이스라엘의 젊은 세대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으로만 호전적 국가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가능케한다는 사실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 배웠다.

남겨두신 열국?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가나안 정복은 성공적이었으나 이후에는 가나안 족속들에게 유화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상당수의 가나안 족속을 정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Q. 시돈, 블레셋, 가나안, 히위 등

블래셋

*블래셋은 b.c 12세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에 당도할 무렵에 팔레스타인 남해안 지방에 정착한 민족이다.

시돈

*시돈은 항구도시였다. b.c 2750년경 함의 아들 가나안이 낳은 장남 '시돈'에 의해 건립된 도시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웃도시인 두로와 함께 언급된다. 지중해 해상 무역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가장 번성했던 도시이다.

4 남겨 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Q. 전체구절

3:4 남져 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다시 ‘시험’ (n며, 나사)과 ‘알고자’ (li1", 야다)라든 두 개의 부정 사가동장하여 절을보완하여 여호와의 시험 의도 를 밝히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남겨 둔 열국들과의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시험하여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명령들을 청종하는지 알아보셔야 했으며, 전 쟁을통하여 이스라엘은반드시 하나님의 명령에 따 라야 함을 알아야만 했다. 이 전쟁은 회피하고 싶다 고 회피되는 것이 아니라, 적들의 공격 앞에 대항하 던지, 굴복하던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계속 이 시험을 진행하신다. 이 시험 은 이스라엘이 전쟁을통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 을 다 얄 때까지, 그리고 전쟁을 통하여 적들을 철저 히 진멸하는 것 자체가 여호와의 계명을 청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철저히 진멸할 때까지 계속 하설 것이다. 그래야 그들에게 안식이 주어질 것이 다. 여호수아와 그 세대는 그들이 전쟁을 다 수행했 을 때 안식을 누렬 수 있었다(수 22:4). 그러나 그것 은 그 다음 세대에게 저절로 세습되지 않았다. 그들 의 안식은 다음 세대의 안식도, 우리의 안식도 아니 다. 그 세대의 시험은 그 세대가 감당해야 한다. 이 시험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있으며 그것은 교회의 ‘영적 전쟁’ 으로 불려진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 니다. ‘영적 전쟁’ 은 우리가 이미 전쟁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시험 인 영적 전쟁은바로우리의 삶자체이다. 그것은진 리를 품으면서 원수를 분별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매일의 삶이다. 우리가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어두움의 세력은 물러가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있는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악의 세력은 점점 더 커져 갈 것이다. 영적 전쟁은 교회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성도의 모든 삶의 한 가운데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 포괄하는 것 이다([)e'.m Sherrnan).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Q.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여부스 사람

*이스라엘 족속들이 가나안 족속들과 타협하며 공존하게 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들은 '가나안 후기 원주민'으로도 불렸다. [가나안의 후기 원주민들은 '여호수아 서론, '가나안의 족속들' 참조하기]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Q. 통혼

이스라엘 사람들이 배교하는 장면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행해오던 배도였는데 가나안 후기 원주민과 함께 거주하며 통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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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아덴의 선교사 사도바울

성경/사도행전|2023. 12. 10. 22:31

요즘에도 예수님에 대해서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까요? 네 아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아테네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아시겠지만 그리스는 철학과 신전으로 유명한 나라인데 그 도시가 바로 아테네입니다. 아테네 여행을 가보면 뛰어난 건축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건축물들 중 신전이 많습니다. 파르테논 신전(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나의 수호자로 여겨진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신전), 에렉테이온(에렉테우스를 위한 신전), 포세이돈 신전 (수니온 곶), 니케신전 등 상당히 많은 신전이 있는 곳이 바로 아테네입니다.

 

사도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바로 이 아테네지역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정말 1도 몰랐던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수 있는지를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17:24)

네 여기 성경절은 사도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은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신전을 많이 짓고 숭배하는데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아테네로 떠난 사도바울

 

사도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데살로니가에 이어서 베뢰아로 갔고 베뢰아(베리아)에 이어서 아덴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아덴은 우리가 아는 아테네입니다.

 

아테네라는 지역에 대해 간단하게 배경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의 성경 이름이 헬라인데, 헬라는 과거 제국을 이뤘던 국가입니다. 이 헬라 세계에서 유명했던 것이 철학, 예술, 학문 등이었는데 우리가 잘아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의 고향이 모두 아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덴이라는 지역은 헬라 세계의 중심지였고 영향력이 대단한 곳이었다. 한마디로 이교문화의 심장부같은 곳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곳을 방문했을 때는 아덴이 펠로폰네수스 전쟁으로 인해 크게 쇠퇴했고 빛을 잃은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과거 명성이 대단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특히, 이곳은 공식화된 우상만 300여개가 있었고 온갖 신들에게 드리는 주상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주상을 만나기가 더 쉬웠을 정도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런 곳을 사도바울이 선교하러 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감정이 잘 나타나있는 성경절이 있습니다.

 

"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 (행17:16)

혹시 누가 위 성경절을 찾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마음이 엄청 분했다고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사도바울이 느꼈던 분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그런 분함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사도바울의 분함은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 감사하게도 제가 좋아하는 책에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바울이 주위의 아름다움과 장엉함을 보고, 또한 도시 전체가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을 보았을 때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시는 것을 알고서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위한 질투심으로 분기되었고, 그들의 지적인 교양에도 불구하고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아덴 백성들에 대해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

 

사도바울이 느꼈던 분함은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지 못하시는데에서 오는 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실에 큰 동정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아덴사람들을 봤을 때, 사도바울은 그가 느꼈던 동정심을 동기로 그들에게 선교를 하고자 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선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듯 싶습니다.

사도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

 

아덴에서 사도바울이 처음 선교를 했던 곳은 아마 저자였던 듯합니다. 저자라면 흔히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될 듯 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선교를 계속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보게됐겠죠?

 

그 내용이 행17:18~21에 나옵니다.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네 아무래도 사도바울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교리를 전하니까 아덴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아레오바고라는 곳으로 초대가 됩니다.

여기서 아레오바고는 아덴 사람들의 귀족회의 였습니다. 한마디로 지식인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여기로 사도바울이 오게 됐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여기서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연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아덴 사람들의 지적 수준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깐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도바울도 지적 교양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는데 가말리엘은 유대교 바리새파 중 최고의 학자였다고 전해지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가말리엘의 수제자 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레오바고에서 유대교 최고 학파의 수제자와 헬라에서 사상의 홍수를 이뤘던 사람들이 만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무래도 그가 가말리엘 밑에서 배운 언변과 지식을 성려께서 사용하실 것으로 기대했던 듯합니다. 듣고 있던 청중이 사도바울의 논리 정연함, 지식에 놀랐지만 이 전도방법에는 결실이 적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별로 없었습니다.

"아덴의 철학자들을 만났을 때의 사도 바울의 경험을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중 논리는 논리로, 과학은 과학으로, 철학은 철학으로 대항하였다. 그의 청중들 중 가장 현명한 사람도 놀라서 아무 말을 못했다. 그의 말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별반 결실이 없었다.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때부터 바울은 활동의 방법을 바꿨다"

 

비록, 아덴에서 사도바울이 선교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실패에 가까운 경험을 했지만 우리가 알 듯이 그것은 과정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이 아덴에서의 경험은 훗날 큰 교훈으로 자리잡아 사도바울의 선교 태도를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22절에 그 내용이 잘 나와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노라" (고전2:2)

사도바울은 이 경험을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이제 자신의 지식으로 선교를 하던 사도바울이 겸손해져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기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할 때 전해야 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네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나처럼 더럽고 죄많은 사람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우리가 전해야합니다. 그 사랑의 절정이 곧 높은 곳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할 때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높이되 우리 자신은 그 아래 낮아져야겠습니다.

 

Q. 바울은 아덴에서의 경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노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혹시, 내가 전도를 하다가 혹은 선교를 하다가 얻은 경험 혹은 교훈이 있으면 한번 나눠볼까요? (크건 작건 상관없습니다. 내가 지금 나누는 작은 경험이 이후에 여기 있는 누군가가 복음을 전할 때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선교의 열쇠: 접점 찾아내기

 

비록, 결실이 적었던 아덴에서의 사도바울이었지만, 우리가 그에게 배워야할 교훈이있습니다.

 

<성경 행:17:22~23>을 누가 읽어주세요.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저 같았으면 이질감을 느끼고 바로 너네들 우상 이거 잘못됐다 이렇게 말해버릴까 같은데, 사도바울은 오히려 그 사람들의 영적인 호기심을 칭찬합니다.

사도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거짓 신과 종교를 폄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바울이 아덴사람들의 종교적 열심을 자신과의 접점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렇게, 우리가 나와 비록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들의 배경을 존중하고 나와 그들의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이 선교에서는 중요한 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셉붓소 이야기

 

조셉붓소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외국인이며 한국말이 서툽니다. 그는 세상사람들과의 접점이자 자신의 달란트를 '노래'라고 생각한듯 싶습니다. '너목보'에 나가고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들은 외국인이 한국 노래를 하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끼고 심지어 그가 노래를 잘하기에 그에게 흥미를 느낍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된 사람들 혹은 믿게된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세상과의 접점을 찾아야합니다. 그 접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갈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모두 자신과 세상의 접점을 찾아내보면 좋을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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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베뢰아 사람

성경/사도행전|2023. 12. 7. 07:30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Q.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지방은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Q. 데살로니가에 유대인의 회당이 왜 있었나?

데살로니가, 아볼로니아, 베뢰아 등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지명은 노랑색으로 표기하였음

*말씀에 따르면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로 다녀간 후 데살로니가 지방으로 갔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였다. 암비볼리는 빌립포 지방보다는 크고 요칭지였다. 바울은 이곳을 한번만 지나갔다.

*바울과 실라가 암비볼리, 아볼로니아에 머물지 않은 이유로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렌스키)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 지역을 선택한 이유도 그곳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선교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Q. 자기의 규례대로 ? 

*여기서 자기의 규례대로 라는 의미는 이미 바울이 늘 그랬던 것처럼 행동했다는 의미이다.

Q. 세 안식일에?

*단순히 3번의 안식일이라는 의미는 아닐 듯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바울은 3주이상을 체류하며 회당에서 가르쳤고 빌립보 교회로부터 쓸것도 공급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계를 위해 노동을 했다는 점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Q. 야손은 누구인가?

*야손이라는 이름은 여호수아 또는 예수에 대한 헬라어 번역 이름이다. 야손은 이방인 또는 유대인이었을텐데 분명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부분이다.


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Q. 신사적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신사적'에 해당하는 단어는 헬라어 '유게네스테로이'가 사용됐다. 이 단어는 비교급 형태로 사용되고 '가문이 좋은' , '출신이 좋은' , '고귀한'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를 바르게 이해하면 베뢰아 사람들 모두가 좋은 가문의 사람들이었다는 의미보다는 그들이 성경앞에 '좋은 태도'와 '깨끗한 마음'을 를 보였다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 '간절한 마음으로'에는 '파세스+프로뉘미아스'가 사용됐다. '프로뉘미아스'는 '준비된' , '자진해서' '열심히'라는 뜻이다. '파세스'는 '모든'이라는 의미이다. 전체적인 의미는 그들이 준비된 마음으로 모든 열심과 할수잇는대로 최선을 다해서 성경 말씀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에서 '상고하다'의 헬러아는 '아나크리노'가 사용됐다. 이는 '체를 쳐서 가려내다' , '자세하게 골라내다'라는 의미이다. 종종 사법적 심문과 관계되 사용되는 단어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날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열심을 다해 구약성경을 살피고 자세히 읽고 그들의 헬라 철학 사상, 생활체험 등을 바탕으로 검토하고 복음을 진리로 받아들였을 테다.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Q. 에비구레오, 스도이고

*에비구레오는 에피쿠로스 학파를 뜻하고 스도이고는 스토아 학파를 뜻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주장한 학파였는데 여기서 '쾌락'은 신체적 고통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스토아학파는 보편적인 이성과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다.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Q. 구절 전체 뜻이 궁금하다.

여기서 '더듬어 찾아'는 뜻의 헬라어는 '프셀라파오'가 사용됐다. 이는 '만지다' , '느끼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소경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더듬어 찾는 것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여기서 이방인들이 소경으로 표현된 것은 이들이 영적으로 어두움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적 어두움의 상태에서 이방인들이 더듬어가면서 방황하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을 섬겼으나 그로부터 영적 갈급함을 해소하지 못했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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