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마가복음 16장 예수님의 부활은 정말 사실일까?

성경/마가복음|2024. 10. 14.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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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부활은 우리가 믿는 신앙에서 왜 중요할까요?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막 16:6)

 

우리는 지난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기시게 된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아까, 우리가 부활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봤는데 저도 고백하면 부활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사실 많이 없습니다. 

 

예전 교회에서 같이 축구하면서 지냈던 동생네 아버지가 집사님이셨는데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면서 장례식에 참석하게 됐을 때 그렇게 좋은분이 돌아가시다니 슬프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어렴풋하게나마 부활에 대한 소망을 잠깐 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때 말씀드렸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은 있어서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되는 듯 합니다.

 

근데, 요즘 더 느끼는 것이 이제 점점 부모님께서 나이가 들어가시는데 사람의 ‘죽음’은 피할 수가 없기에 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내가 얼마나 슬플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제가 확실하게 믿고있지는 못하지만 ‘부활’이 있기 때문에 정말 작은 소망이라도 갖게 되는 것 같아서 감사한 것 같습니다. 제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엄청 없는데 이것과는 별개로 ‘부활’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근간이 되기에 무척 중요한 주제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다“고 말씀했습니다.

저처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아직 없는 분들은 그래도 오늘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부활’을 알고 또 부활을 믿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안에서 잠들 수 있도록 전심으로 기도하길 바라겠습니다!

제 16 장

살아나시다 


1
안식일이 지나매막달라마리아와야고보의 어머니마리아와 또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1)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나사렛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Q1.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언제였습니까?

안식후 첫 날이기에 일요일 아침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사복음서에서는 이들이 해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갔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날 미명에 일어났다고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그 날을 안식일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을 의미있게 당연히 생각해야 하지만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다는 근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신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날을 예배일로 지키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Q2.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골로새서 2장 12절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침례예식을 통해서 부활을 기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침례의 의미가 물속에 잠김으로 인해서 완전히 몸 전체가 죽은 상태였다가 다시 일으켜지면서 새 생명을 얻는다 곧 부활했다는 의미인데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기념하는 방법은 침례의 행위도 그렇겠지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안에서 거듭나는 경험입니다. 나의 죄로 인해 죽으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성령의 침례를 통해 나의 그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지어주셨다는 믿음을 갖고 그때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 진정 부활을 기념하는 방법

 

 

Q3. (교과 적용질문)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들에게 인생을 뒤바꿀만한 사건이 되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요일 본문에서 찾아볼까요?

 

6절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보시면 청년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면서 말로만 하지 않고 무엇이라 합니까? 와서 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를 직접 보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이 여인들은 이것을 보고 뭘 했을까요? 마태보음 28장 8절 “그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을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려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여인들이 슬픈마음으로 예수님의 시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아 누가 이 큰돌을 굴려주면 좋을텐데.. 그런데, 한 청년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직접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이제 믿음가운데 기뻐하며 그 소식을 전하러 가는 겁니다.

 

즉, 우리들도 부활을 성경상의 이야기로만 치부하지말고 개인 스스로가 성경과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를 찾을 때 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부활’이 나에게 산 소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월 돌이 굴려져 있는데

 

7가서 그의 제자들과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정리: 다른 복음서를 참조해서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한 소식을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돼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했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말하고자 말을 아꼈다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합니다.>

 

Q1.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로마서 1장 4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만약,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정말 4대 성인으로만 남으셨을 수도 있다는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셧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겁니다. 그래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Q2. 아까 학습목표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이나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일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우선, 역사로 기록에 남으려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증거를 과학적 입증 방법을 거쳐서 역사로 기록에 남게 됩니다. 그런일을 하는 사람들을 역사학자라고 하는데

 

토마스 아놀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가장 잘 증명된 사실이다”고 이야기했어요. 역사학자인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이 가장 잘 증명된 사실이다고 말했어요. 학자들이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이야기로만 치부될 것이 아닌 역사적 사실이라는 겁니다.

 

역사학자들보다도 더 증거중심주의 자들이 법관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국의 애드워드 클락 이라는 대법원 판사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법률적으로 검토했어요. 법률 재판 때의 사건을 다루듯 증거와 자료들로 검토를 한겁니다. 그리고 뭐라고 했냐면 “내가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확증적이다. 내가 대법원에서 많은 판결을 내려봤는데 이렇게 확고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신실한 증거는 항상 꾸밈이 없고 결과에 개의치 않는다(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법률가로서 복음서의 증거를 받아들인다. 부활은 사실이다”고 말했어요.

 

저널리스트들도 엄청 비판적인데,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저널리스트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참 비판하기 좋은 사건인 듯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볼 겁니다. 프랭크 모리슨이라는 저널리스트는 사람들이 바보같이 믿는 예수님의 부활을 오류로 도출하기 위해서 저널리즘의 열정을 갖고 그 사건을 파헤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신화일 뿐이다 면서요.

깊게 파헤치고 파헤치고 그 결과를 책으로 썼습니다. 그 책은 결과적으로 부활의 허구성이 아닌 부활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책이 되버렸습니다. 그 책이 바로 ‘누가 돌을 옮겼는가’하는 책인데, 부활에 관한 아주 고전적인 변증서로 남게 됐습니다.

 

최근에도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이 일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요. 리스트로벤이라는 사람인데 미국 ‘시카고 트리뷴지’에서 근무했던 사람인데 유명한 신문사인데 그 사람도 그것을 파헤치는 겁니다. 그 사람의 동기는 아내였습니다. 자신이 유명한 신문사의 저널리스트인데, 심지어 법률을 전공해서 과학적인 증거들과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인데 자신의 아내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미신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 사람은 철저한 무신론자였어요. 발품을 팔면서 몇 년동안 최고의 석학들을 만나고 다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오류로 입증하기 위해서요. 다년간의 연구가 마치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버렸습니다. 이 책이 편찬됐고 우리나라에서 영화로도 개봉됐습니다. 영화제목 아시나요? “예수는 역사다” 실제 자기 일대기를 영화로 만든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무덤을 찾은 그 여인들처럼 그 증거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깨져버리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 4가지

 

  1.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

눅24:3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반론1: 죽지 않고 혼절했다가 깨어나고 무덤을 탈출했다.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몸이 찢겨졌고 과다출혈 상태였고 극히 안좋은 몸상태로 6시간정도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고 거의 다 죽은 상태로. 창으로 심장을 관통했을 때 물과 피가 분리돼 나왔고 이건 찾아보니까 심장이 펌프질을 멈췄기 때문에. 사망선고를 받고 빌라도 총독이 재차 확인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는지. 그런데, 그 상태로 살아있다고 해도 의료 조치 없이 그 차가운 돌무덤에서 30시간이상 갇혀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살아 있더라도 그 바위를 굴려내고 밖에는 누가 있나요? 영화에서는 2명인데, 로마 군사 100인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파수꾼이 100인대였기 때문에. 당국자들이 두려워서 시체가 사라지는 것을 막고자 그렇게 배치한겁니다.

 

반론2: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

제자들은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훔쳐갔다는건 말이 안되기에

반론3: 당국자들이 시체를 숨겼다

 

그래서 시체가 사라진 것은 부활밖에 증거가 없다.

 

2. 예수님의 수의가 정리돼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게 아니라면 탈출했다면 그 급박한 상황에서 수의를 정리하셨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부활하신 분이 정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역사적 사실.

 

3.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다수였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서로다른 부활사건이 10건이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 여 제자들, 베드로, 엠마도 2제자, 다락방 10제자, 도마, 갈릴리 산에 모여서 예수님을 본 500여명의 성도들, 주의 형제 야고보, 갈릴리 호수에 갔던 사도들, 승천하실 때 감람산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목격자라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허상을 본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데 동시에 한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목격자가 있는 것이 그 주장에 대한 반박이 됩니다.

 

4. 제자들

 

사도행전 4장 18-20절 누가 읽어주세요!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산헤드린이 야 니네 예수님 이야기하지마라 죽는다 이럽니다.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의 말을 듣는게 나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게 많은지 판단해봐라. 우리는 보고 들은 걸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쫄아서 도망가고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 너 예수님이랑 같이 다녔던 사람 아니야 하니까? 난 모릅니다 하면서 3번이나 부인했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당당하게 산헤드린에 맞서는 겁니다.

 

마지막 증거는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사건을 기준으로 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후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어요.

 

예수님의 부활 전에는 서로 다투고 교만하고 폭도들에게 예수님을 내어주고 도망가고 

믿음없는 모습을 보였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이후,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고 끓는 어떤 사람은 칼에 목이 잘리고 어떤 사람은 끓는 물에 몸이 던져졌습니다. 십자가 사건처럼 예수님 부인하고 도망가면 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이 바뀌기가 정말 어려운데 어떻게까지 제자들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예수님의 부활말고는 다른 이유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도 성경상의 이야기로만 부활을 이야기하지말고 부활을 나의 삶에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댓글()

[마가복음] 마가복음 15장 1-32절 빌라도, 구레네 시몬, 십자가

성경/마가복음|2024. 10. 1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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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구시에 예수께서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15:34)

서론: 마가복음 15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마가복음 후반부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15장은 그 중심입니다.

  • 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막 15장1-15읽기)

1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빌라도가 묻되 네가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6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요약: 대제사장들과 장로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빌라도라는 로마 총독에게 넘겨줍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그리고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총독의 역할은 

  • 총독은 조세 업무 감독.
  • 중요한 경우에는 재판관으로 활동.-사형 판결을 내리고 집행하게 하는 것도 총독의 권한
  • 총독은 또한 군대를 통솔

 

Q1. 빌라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15:1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는 일을 예수께 고하니 (눅13:1)’라는 말씀으로 보아 빌라도는 언제라도 사람들을 쉽게 죽이는 사람이자 폭력적으로 다스렸다는 의미입니다. 군대가 성전까지 들어와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을 쳐 죽인 일이 있었다는 의미.

 

15장 1절에 보면 산헤드린은 언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러 갑니까? 네 맞습니다. 새벽부터 갑니다. 왜 새벽부터 갔을까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마가복음 14장을 연구했는데 막14:2에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지 않기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합의를 봤습니다. 만약,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면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지지난 시간에 영상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았어요. 예수님이 입성을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만약, 적법절차에 따라 예수님을 심문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다면 분명, 민중이 난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엄청 신경 쓴 지도자들은 ‘새벽’에 불법적인 절차에 따라 그 일을 처리하길 원했고 급했음. 그래서 으레히 사형선고를 내려주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감

 

Q3. 질문입니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을 넘겨받고 갑자기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나 –15:2

 

마가복음에 많이 생략이 돼 있어서 그럽니다. 요한복음을 보니까 18장 29절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끌고온 사람들에게 묻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가 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그랬더니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이 예수가 흉악한 죄인이니까 데려왔지 그냥 데려왔겠어 빨리 사형시켜! 라고 하는겁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의 입장에서는 평상시 빌라도가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 다루듯 쉽게 다루었고 사형선고도 잘 시켰기에 새벽부터 예수님을 빨리 사형시켰으면 좋겠어서 데려온건데 갑자기 ”이 사람을 왜 죽이려고 하는지“ 물어보는 겁니다. 그래서 쥐어 짜내서 위증을 한 내용이 뭐냐면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했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했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누가복음 23장 2절. 그래서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예수님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종합해보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에게 빨리 사형집행되기를 바라고 빌라도를 찾아왔습니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누군가를 사형집행시킬 권한이 없었어요. 그래서 로마 총독 이자 빌라도를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 목숨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또 질문입니다. 평상시에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쉽게 내리던 빌라도는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왜 죽이려고 하는지 물어봤을까요?

 

그가 예수님을 대면하고 그가 지금까지 봤던 사람들과 달리 너무나 고결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죄인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봤던 겁니다.

Q4. 왜 예수님께서는 허위 고소로 인한 총독의 심문에 대해서 ”네 말이 옳도다“라고 하셨을까 –15:2

예수님은 자신의 앞에 선 빌라도가 예수님 자신에게 영적으로 끌리는 것을 아셨다. 비록,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옳도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자신을 끌고온 사람들이 옳다구나 싶어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 짐작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과 죽음보다 중요한 것이 앞에 있는 ‘영혼’ 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진리를 제시하신 겁니다. 

 

Q.5. 왜 빌라도 총독은 정치적 압박과 빗발치는 고소에도 그분을 살리려고 명절의 전례까지 이용하며 그토록 애를 썼는가? 빌라도라는 인물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살리려고 했습니다. 

-전체내용

빌라도 앞에서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상상해봅시다. 빌라도와 대면하시는 뒤편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악에 받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압박하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란스럽고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기 방어를 하려고 움직이기 마련인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자기 변호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아도 화도 내지 않으십니다. 빌라도는 많은 심문의 경험을  통해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분에 대한 존경과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들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시대의 소망에는 ‘조롱의 표시인 자줏빛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쓰고 서 있는 그분이 하나님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써있습니다. 그리고 그 빌라도의 아내의 서신에도 ‘그를 해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많이 생략이 돼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계속 살리려고 거의 10번에 가까이 거듭거듭 노력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심지어 명절의 전례를 이용하면서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나,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우리가 빌라도를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무너진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4:27에 빌라도를 ”이방인과 헤롯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 해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헤롯과 같이 그도 예수님을 거스르고 죽인 악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읽었던 성경절에서 찾아봅시다>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라고 나와있습니다.

빌라도는 그간의 심문 경험으로 그리고 양심을 통해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확신대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끌고온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위치가 압박을 받게 될까봐 (이건 그가 이전에 행했던 악한 일로 인해 황제에 의해 자리를 잃게 되는 이유) 양측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무리의 만족을 주는 선택을 하게 된겁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칠까봐 그 악의 편에 섭니다. 그렇게 타협함으로써 양심을 거스르게 되는 겁니다. 즉, 내가 어떤거 하나라도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사망의 길이 됩니다. <디모데전서 1:19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Q. 나의 무지로 인해 잘못한 적은 없었나요? 무지라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까 무지도 잘못이라고 느꼈던 적은?

  • 막15:15-20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경례하여 이르되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 요약: 빌라도가 무리가 너무 들끓자 이제 예수님을 군인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브라이도리온’이라고 나와있는 곳이 있는데 여기는 ‘병영’이라고 보시면 될듯합니다. 병영이란 군인들이 주둔하는 건물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조롱을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수치와 폭행을 당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오시기 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새벽 전 밤에 끌려가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수치를 당하시고 폭행을 당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빌라도의 집무처에 있던 군대는 이방사람들이었고 대제사장 가야바가 있었던 곳에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였지만 똑같이 예수님을 폭행했다는 사실이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똑 같은셨는데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죄나 이방인의 죄나 다 짊어지고 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구분없이 책임지시겠다는 의미. 그들 모두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 모두에게 용서의 길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에서 반복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이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냐?‘ 이로써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월 영감의 교훈 읽기>

 

화 십자가  

 

성경구절:막15:21-32

 

21 마침알렉산더와루포의 아버지인구레네사람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예수를 끌고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그 위에 있는 죄패에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1)(없음)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Q1. 왜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했는가

 

십자가의 실제 무게는 59kg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갈 수 없고 졸도하시니까 대신 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보면 로마 군인들이 피지컬이 상당합니다. 실제로도 그랬을텐데 왜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지지 않았을까요? 십자가 형벌은 고대 로마의 사형 방법 가운데 하나인데 가장 굴욕적인 처형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앞에서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많은 예술작품에서는 예수님의 중요 부분에 옷이 있는 그림을 우리가 접하게 되는데 요한복음 19장 23절을 보면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옥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라고 나와있습니다. 즉, 십자가형을 받게되면 나체로 십자가에 달리게 되며 굴욕과 수치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형이 가장 악명 높은 형이었던 이유는 화형이나 팽형 등도 고통스럽지만 그것들은 고통의 순간이 짧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최대한 죽지않게 인간의 정신적 한계를 체감시키고 숨을 끊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에 보면 십자가 형을 소개한 영상이 있는데 거기 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십자가형은 죽음의 모든 차원을 경험한 후에 죽게된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다시말하면 십자가는 굴욕의 상징이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신으로라도’ 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군병들도 대신지지 않았고 옆에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라는 이유로지지 않았죠. 핑계를 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구레네 사람 시므온이 예수님을 측은하게 보고 동정으로 바라보니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겁니다. 어찌보면 그가 강요에 의해 십자가를 졌다고 볼 수 있겠으나 성경 어디에도 그가 저항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동정했고 십자가를 대신 지기로 했다는 증거입니다. 21절에 보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구레네 사람 시므온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마각 기록한 이유는 알렉산더와 루포가 그의 동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시므온은 아들들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을 것으로 추정은 됩니다. 

 

한가지 더 알고가면 좋은 것은 시몬이 환경에 의해 십자가를 지게 됐지만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가는 과정이 예수님을 그가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14:27)’ 고 하셨습니다. 역사상 유일하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은 구레네 시몬이 유일무이했습니다. 그말은 곧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감으로써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는 겁니다. 이 행위 자체에서 시므온이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체험으로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그분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Q2. 몰약 탄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는?

십자가형이 무척 고통스럽기 때문에 몰약탄 포도주라도 줘서 약간의 진통제 같은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권하는데 이것은 관례입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라도 영적인 분별력을 흐리게 하는 것은 드시지 않았던 겁니다. 그 상황에서도 절제하시고 인내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이장면이 ‘몰약탄 포도주 대신 ’쓸개 탄 포도주‘라고 이 구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69편 21절의 예언의 성취인데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포도주‘가 결국 술일텐데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전쟁 중에 마취제나 진통제가 없을 때 술을 사용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잠언 23장 31-32절에 보면 “포도주를 보지도 말지어다”라고 하고 또 “이것이 마침내 뱉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다”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정신이 혼탁해져서 사탄에게 뱀 같이 물리고 독사같이 쏘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마심으로써 비록 약간의 진통효과는 있었겠지만 정신을 흐리게 해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되니 그것을 생각하고 거절하셨다로 보시면 됩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의인으로서 묵묵히 망치질을 믿음으로써 했고 방주의 구원을 경험했던 노아조차도 그 술 한잔으로 인해 패배를 당하게 됐습니다. 

 

Q3. 왜 이런 과정이 필요했을까?

Q4. (26절)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힌 죄패가 의미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복음서에 보니까 이 죄패를 많은 언어로 기록했다고 나와있습니다. 만국 공통어로 기록한 겁니다. 어디서 왔든 읽을 수 있게. 사실 이 죄패는 빌라도에 의해 이렇게 기록이 됐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적혀졌다고 영감의 글에 나와있습니다. 예수님의 죄패는 약간 최초의 전도지 같은 느낌이었던 듯 합니다. 전도지는 짧고 명료해야 하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야 하고 눈에 띄어야 하는데 이 죄패가 딱 그랬기 때문입니다. 

 

Q6. 왜 꼭 예수님의 좌우편에 2명이 있어야 했을까? 왜 그들은 2명이어야 했으며 좌우편에 있어야 했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지가의 위에 죄패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적혀있었을텐데 그것을 지러 갈 때 이 두강도가 함께 갔고 많은사람들이 그 죄패를 봤겠지만 누구도 봤다? 그 강도들도 봤다. 그런데, 그 죄패 즉,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고도 한 사람은 구원을 얻지만 다른 한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제 3의 선택지는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죄패라는 전도지를 보고도 어떤 사람은 왕으로 인정하거나 어떤 사람은 대적하거나 하는 겁니다. 

Q7.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에 주님이 끝까지 응하지 않으신 이유를 그 조롱 속에서 찾아보자.

(영감의 교훈)

 

 

 

 

 

 

 

 

 

 

 

 

댓글()

[마가복음] 마가복음 14장 향유 옥합 사건, 유다의 배신

성경/마가복음|2024. 9. 2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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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의 후반부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1-10장에 배치했고 11장부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및 십자가사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야 그렇다치고 마가복음 11장부터 16장까지 총 6장에 걸친 이야기가 펼쳐지는 실제 소요기간은 단 10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건의 전개가 느리고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처럼 마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는 사건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하는 겁니다. 오늘부터 나눌 마가복음 14장-끝인 16장 까지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심문 받으시는 내용을 살펴보는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붙잡히시게 됐는가, 그리고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제자들이 도망가는 내용 등이 나옵니다.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위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마셨어야 할 잔이 예수님도 감당하기 힘들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비록 이 잔을 마시기가 싫지만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라며 끝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기도로 마침표를 찍으시는 겁니다.

 

Q. 내가 받았던 선물 중에 가장 의미있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왜그렇습니까?

향유옥합 사건 (마가복음 14장1-11절)

  • 명절에 예수님을 죽이기 원치 않는 산헤드린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붓다

3 예수께서베다니나병환자시몬의 집에서1)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나드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2)데나리온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 유다의 배신

10열둘 중의 하나인가룟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지금 읽은 말씀을 3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을 것 같은데 한번 편하게 나눠보고 말씀해주실 분 있으실까요? 지금 읽은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면?

1-2 예수님을 잡으려는 계획

3-9 향유옥합 사건

10-11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내용

 

  • 이게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5번째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샌드위치란 빵과 빵사이에 치즈가 들어가는 것이고 우리가 이것을 빵 따로 치즈 따로 먹지 않는 것처럼 그 이야기를 한번에 같이 소화해야 의미가 깊고 이것은 마가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 어떤 이야기가 빵(전체)이 되고 어떤 이야기가 치즈(속) 이야기가 될까요?

 

제 제사장들과 서시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줘 예수님께서 결국 잡히시는 내용이 전체 (빵)이 됩니다. 그리고 향유옥합 사건이 치즈가 됩니다.

 

  • 향유옥합 사건은 혹시 언제 일어난 일일까요? 

네 지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는 유월절 몇일 전이냐면 이틀전입니다.

 

그런데, 향유옥합사건은 요한복음에 보니 ”유월절 엿새 전에...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예수님께 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은 유월절이 있기 이틀전에 시행된 것인데, 향유옥합 사건은 유월절 엿새전에 일어났던 사건인 겁니다. 

 

  •  그럼 마가는 왜 엿새전 이야기를 이틀전 이야기에 끼워놨을까요? 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내한테 이야기할 때 시차순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이야기를 다 들려줍니다. 

그럼 마가라는 인물은 왜 이 이야기를 샌드위치 구조로 만들었을까요? 

  •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됐던 것이 향유옥합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향유옥합 이야기를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옥합을 붓고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을 왜 300데나리온 이상의 값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느냐고 말을 합니다. 이 주동자가 누구였습니까?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지적하는 일을 오히려 칭찬해주시고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일을 기념하라고 하시니까 유다는 어떱니까? ‘책망을 느꼈고 자존심이 무척 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발이 어디로 나아가는 겁니까? ‘예수님을 따랐던 발걸음이 이제는 예수님을 팔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님이 붙잡히시는 이야기 가운데 향유옥합사건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이것을 이렇게 치즈로 배치한 것입니다.

 

  •  그런데, 이 이야기를 샌드위치 구조로 만든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서 마태복음에보면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리우리라“ 예수님께서 지금 언제 자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고 있나요? 네 맞습니다. 유월절에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계신 겁니다. 자, 다시한번 마가복음 14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지도자들은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자고 합니까 안합니까? 안합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돌아가신다고 예언을 했는데 이렇게 되면 예언이 성취가 되지 않는데 어떤 사건을 통해서 그 예언이 성취가 됐다? 향유옥합 사건을 통해서 그 예언이 성취가 됐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마가가 의도를 갖고 이렇게 샌드위치구조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9절에서 ”저를 기념하라“고 하시면서 여인의 행위를 복음과 함께 영원히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4복음서를 살펴보면 어떤 이야기는 있는데 어떤 이야기는 이 복음서에 없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에 다 기록이 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것을 기념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드 향유는 지금도 인도에서 여자들의 머릿기름의 향유로 쓰이고 있다. 고대 유럽에서는 값비싼 향유로 즐겨썼습니다. 지금은 향이 너무 짙어서 향료로 쓰이지 않고, 신경 안정제로 사용하고 있다.

 

  • 데나리온의가치: 노동자의 하루품삯

지금 최저임금이 10,030원 이니까 일당으로 치면 하루 80,240원이다. 지금으로 치면 24,072,000원 정도!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는 연봉인 금액의 가치를 이 여인은 드렸다!

 

우선, 이 여인이 행한일은 자신의 의도를 갖고 행한 일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이 일을 행한겁니다. 성령께서 왜 그녀로 하여금 이 일을 하게 하셨냐면 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할 것인데, 그 중대한 일을 표상하게 하려고 그녀를 감동 시킨 것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면 1년치 노동자의 품삯이라고 합니다. 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그녀는 몽땅 다 드린겁니다.. 그 사건이 표상하는 것은 고귀하고 값진 향유 옥합이 사랑으로 인해 깨져서 그 방안을 향기로 가득 채운 것처럼 고귀하고 존귀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세상을 구원할 향기가 온 세상에 가득할 것이라는 표상인 겁니다. 

 

  •  교과 교훈에 보면 ‘예수님께 드린 여인의 선물은 주님을 배신한 유다의 비열함과 대조를 이룬다.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은 기억될 것이며 유다의 잘못도 후세가 기억할 것이다’고 나와 있는데 자, 유다를 한번 생각볼까요. 유다는 제자들 중의 재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다른 제자들과 달리 똑똑하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서열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 유다가 불만을 퍼뜨리거나 해도 다른 제자들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는 훌륭한 인물이니까. 그리고 향유옥합을 부었을 때 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느냐고 말하도록 주동한 사람도 유다였습니다. 자, 그런데, 유다가 지적한 행동을 예수님께서는 기념하라고 하셨으니 유다가 무척 책망을 받고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파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람이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적대하는 쪽에 서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A. 성령의 책망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 회개하라는 성령의 강권이 들릴 때 순종하지 않고 뻣뻣하게 버티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다처럼 성령의 책망이 들리게될 때 쉽게 이성을 잃게 되는 듯합니다. 

 

<예화: 어떤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회개하라’가 주제였습니다. 설교가 마치고 비상대책위원회가 소집됐고 회개하라는 설교는 나이많은 목사님이 해야 한다고 말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의견을 제시한 분이 한 장로님이었는데 대쟁투 총서를 여러번 필사하셨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고 교회안에서도 꽤 존경을 받았던 분인 것 같습니다. 사실, 대쟁투 총서는 자존심을 세우기보다는 자존심이 무너지는 사랑의 권고들이 많아서 그것을 여러번 읽고 필사한다면 영성이 더 깊어지게 될 텐데. 젊은 목사가 회개하라는 설교를 했을 때 그분에게 그것이 상처가 됐나 봅니다.

 

묵상: 유다가 진짜 가식적인게 향유 옥합을 부은 여인에게는 사람들에게서 꼽을 주다 못해 진짜 개망신을 주려고 작정하면서 그 옥합을 300데나리온 이상의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다.. 어쩌면, 가룟유다의 그 모습을 통해 그가 모든 것에 계산적이며 세속적 가치로 환원하는 사람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영적인 가치를 보시며 마음을 봐주신다..

그 사실이 감사하다.

 

 

최후의 만찬 (마가복음 14장 12-21절)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1)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요약: 제자들이 예수님께 유월절에 어디서 유월절 음식을 먹기 원하시는지 여쭤본다 --> “성내로 들어가라 가면 물 한동이를 이고가는 사람들 만날 것이다 ” -->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객실이 어디있느냐“ --> 그렇게 하고 날이 저물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잡수심 -->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려고 한다.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Q. 하나님께 약속했다가 무슨 이유로든 결국 그것을 지키지 못했던 경험은? 그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배반 예언 (마가복음 14장 22-31절)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언하시다(마 26:31-35; 눅 22:31-34; 요 13:36-38)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3)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ㄱ)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4)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22-26 마지막 만찬: 유월절에 만찬을 먹는 이유는? 

 

25 –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에서 포도나무 열매 중 새것을 마시겠다고 하시고 다시는 이땅에서 마시지 않겠다고 하셧을까. 이 의미가 무엇일까

 

Q. 왜 주님은 만찬 가운데 떡과 포도즙으로 새로운 기념일을 제정하셨는가?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유월절은 이제 폐하여질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림자가 아닌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롭게 재정하신 기념일은 유월절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매 식사 때마다 할 수 있는 겁니다. 유월절은 1년에 한번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새롭게 재정하신 기념일은 빈도수가 더 많아지는 겁니다. 우리 교단 중 교회마다 다르겠지만 성만찬 예식을 1년에 1-2번 하는 교회가 많은 듯 합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매일 모였습니다. 그리고 매일 예찬을 나눴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매 식사 때마다 그분의 사랑과 죽음을 기억할 수 있도록 이 제도를 만드신 겁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1장 25절에보면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으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떡과 포도즙을 마실 때마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꼭 떡과 포도즙이 아니더라도 식사는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니까 그때마다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을 기념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영생을 위해 내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음으로써 그 생명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갈바리의 십자가 사랑을 기념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이 예식을 제정하셨다. 우리가 우리를 짓누르는 죄와 고통 또 교만 등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고 예수님안에서 자유와 평강과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제정하셨다. 

 

Q.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즙을 먹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셨는가? 제자들은 그날까지 먹으라고 하시고선 예수님은 왜 포도즙을 먹지 않겠다고 하시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초점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위로의 말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사실에 그리고 예수님과의 마지막 식사자리라는 사실에 슬펐을 것이다. 작별의 마지막 식사였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위로이자 서약을 하신 겁니다. ‘내가 다시 오는 날 그때 너희와 함께 먹겠다. 내가 그때까지는 다시 먹지 않겠다. 내가 빨리 오겠다’.. 그 말씀으로 제자들은 위로를 받았고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 없는 그 자리에서도 만찬을 가지시면서 이게 예수님의 살과 피야.. 그때 예수님이 그랬지 주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까지 다시다시지 않는다고 하셨어.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하셨던 겁니다. 

 

Q. 그분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를 마치신 뒤 함께 부른 찬미는 어떤 찬양이었는가? 

시편 117편에 보면 유월절 찬야이 있는데 그때 배정된 유월절 찬양을 그냥 부르신 겁니다. 내용이 되게 힘차고 희망찬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죽으러 가실 때 슬퍼하지 않으시고 즐거워하는 창송을 부르셨다. 

 

<시편 117편에는 유월절 찬양이 어떠한지 나와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ㅊ칭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모본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모습이 뭐가 있을까.. 그리스도인 즉 복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슬픔의 때에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삶에 먹구름이 왔을 때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입술에 찬양이 있어야 한다. 왜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시고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주는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것이니까요. 우리가 근심과 두려움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 주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술에 찬양을 갖고 살아가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하고 멋진 그리스도인이다. 쨍이쨍이 멋쨍이

 

Q. (막14:27-31 베드로 및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을 예언하심) 제자들이 그분을 버리겠지만 그분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에 대해 주님의 예언에 대해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 그래도 찬양하기

 

<29절에 보면 베드로가 그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외에도 제자들은 기분이 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버려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기분이 상했을까요? 네 자기들이 연약한걸 모르고 자기 과신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속 이야기 했는데 ‘아 예수님은 나를 뭘로 보시는 거야’라고 생각했겠죠. 우리가 여기서 가져야할 교훈은 ‘자기 자신이 연약하다’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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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3장 예수님의 마지막 때

성경/마가복음|2024. 9. 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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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번기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총 16장까지 구성돼 있는데 우리가 오늘 나눌 내용은 12장의 마지막 부분과 13장입니다.

 

마가복음의 총 1장-10장까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고

지난 주 공부했던 11장-16장까지는 무슨 내용이 나오냐면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1-10장까지는 3년반동안 있었던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이고 11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단 일주일에서 열흘정도의 일을 6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왜 3년반동안의 이야기는 10장에 압축해 놓고 일주일 남짓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성경 6장에 이렇게 늘여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끝이 가까울수록 사건 전개가 어떻게 되나요? 네 느려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것에 집중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절: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막13:26-27)

 

<학습 목표 읽기>

 

느끼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지 않고 시험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인도하신다? 성령께서 인도하신다. 

 

‘행하기’에서 말하듯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을 끄고 자고 있는데 누군가 불을 켜며 깨울 때 자고 있던 내 시야에 빛이 들어올 때 갑자기 너무 빛이 밝아서 그것을 쳐다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영적 시각이 잠들어있으면 아무리 마지막 때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어도 예언이 성취되고 있어도 절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깨어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Q.  <도입질문> 사소한 행동이라고 보았던 것이 큰 결과를 낳은 것을 경험해 봤습니까?

<해외에서 축구 하고 있던 선수를 인터뷰 하는게 목표 – 스포츠 에이전시 – 사업도 살짝 같이 – 독일도 다녀오고>

 

일 주께 드린 적은 동전 두 개

<막 12장 41-44절 읽기>

두 렙돈이면 지금으로 치면 얼마정도입니까? 

 

우선, 당시 이스라엘의 화폐에는 달란트, 므나, 드라크마, 데나리온, 앗사리온, 고드란트 등이 있는데 ‘렙돈’이라는 동전은 화폐단위에 끼기에도 낮은 그냥 ‘푼돈으로 사용했던 동전’ 정도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1렙돈의 가치가 그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1/64의 가치였다고 합니다. 검색해보니까 대략 현재 최저시급 기준 8시간 근로한다고 계산을 해보니 2,500원정도 였습니다.

 

Q. 자, 그럼 다른 사람들은 훨씬 많은 헌금을 드렸을텐데 어떻게 이 가난한 과부의 2,500원 정도의 헌금이 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이 다른 모든 사람의 헌금보다 더 크다고 선언하셨는가?

 

우리가 읽었던 마가복음을 제가 다시한번 보니까 가난한이라는 단어가 2번, 구차한이라는 단어가 1번 나옵니다. 총 4절의 성경절인데, 마가는 이 과부가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정말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가난한’ 이라는 단어의 원어가 휘스테레세오스라는 단어인데 이 의미는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필요 조차 채우지 못하는 극도의 가난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생각해볼 때, 그녀에게 이 헌금은 정말정말 큰 금액이었을 것이고 큰 희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지도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많은 헌금을 드렸어도 그들에게 큰 타격도 없었을 것이고 희생도 없었고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당장 내가 지금 먹지 못해도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마음인 자기희생적 태도로 헌금을 드렸고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에 이것을 드려도 당장은 먹고살기 어렵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헌금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을 때 자신의 생활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하나님께서 날 먹이신다는 믿음을 갖고 헌금을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헌금을 크다고 선언하신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부자들의 헌금은 자기희생과 믿음이 아닌 자기영광을 위한 헌금이었던 것입니다. 나 얼마냈어! 이렇게요. 

 

하나님께서는 헌물을 드리는 동기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요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라고 그녀의 헌금의 가치를 사람들이 보는 관점 우리가 보는 관점과 다르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혹시,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부은 여인의 이야기를 모두 아시죠? 네. 그때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칭찬해주시면서 뭐라고 말씀해주시냐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내려오고 있습니까? 네 우리에게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자 다시 그 가난한 과부에게로 돌아가봅시다. 그 가난한 과부가 그 가난 중에 드렸던 헌금의 이야기를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듣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녀의 믿음에 감동해 헌금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내다보시고 그 여인이 다른 사람보다 헌금을 많이 넣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류대균 교과 말씀

 

Q.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헌금드리는 마음을 칭찬하셨지만 과연, 그 돈이 하나님의 사업에 바르게 사용된다고 볼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만나시기 하루전에 무슨일이 있었냐면 성전 정결 예식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모습이 어땠습니까? 장사의 소굴이었습니다. 이 여인도 분명, 자신이 헌금을 드렸을 때 지도자들이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그것을 알고도 헌금을 드렸던 것입니다.

 

Q. 오늘날, 우리가 드려지는 헌금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 행정 절차에 맞게 쓰여집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그 헌금이 우리가 느낄 때 올바로 사용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헌금을 드려야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시대의 소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은 과부의 예물을 강요하여 악용한 이기심을 책망하셨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창고에 그의 예물을 가져온 과부를 칭찬하셨다. 사람이 예물을 악용한다고 하여 그 바친 자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 (소망,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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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1-12장 논쟁

성경/마가복음|2024. 9. 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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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은 마가복음 11-12장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의 제목에서 나왔듯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있고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 성전 정결, 예수님의 권위에 관한 논쟁, 예수님의 비유, 재림과 종말에 대한 예언 등이 나옵니다.

 

오늘의 제목이 논쟁인데, 

마가복음에는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공부했던 지난 3과에서 공부했던 막2-3장에 5가지 논쟁이 있는데

죄 사함에 대한 논쟁

죄인과 함께 하심에 대한 논쟁

금식에 대한 논쟁

안식일 논쟁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에 대한 논쟁

 

우리가 오늘 배우는 9과에서는 논쟁을 약 6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

악한 농부에 대한 비유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해

결혼과 부활에 대해

큰 계명

헌금

 

또 우리가 짚어야 하는 부분은 예수님의 사역지의 변화입니다. 지난 마가복음 10장부터 예수님의 사역지가 이제는 갈릴리근방에서 큰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전환 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당신의 고난 및 사명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또 마가복음이 마가에 쓰여진 것이기에 우리는 마가가 이 마가복음을 읽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역과 지상생애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마가복음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주신 후 이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을 잘 보았습니다. 이것을 메시야 비밀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존재를 감추려고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시는 것입니다.

 

<학습목표 읽기>

 

Q. 나를 힘들게 했던 편견이 있다면 나눠볼까요? 어떻게 극복했는가?

 

일 승리의 입성

 

<막 11장 7절 읽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야 하는데 말이 아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을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참 모양빠지는 입성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시대의 소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500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왕의 오심을 예언했다. 이 예언은 이제 성취될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왕의 영광을 거절하신 이가 이제 다윗의 보좌의 약속된 후계자로서 예루살렘에 임 하신다"

 

<영상 시청>

 

예수님의 입성에 도성 전체가 들썩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군중이 "호산나"를 외쳤는데 원래 의미가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나귀새끼를 타셨을까요?

 

<일요일 영감의 교훈 읽기>

 

<슥9:9 읽기>

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500년 전에 한 선지자가 예언을 했습니다. 왕이 임할 것인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타냐고까지 했냐면 나귀가 아니라 나귀의 새끼라고 했습니다. 참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예언입니다. 예언 그대로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 9:9의 예언의 성취였고 예수님께서겸손하신 왕, 공의로운 구주이심을 상징합니다.

 

또 공개적으로 입성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진정한 구주이자 왕이심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군중들은 호산나 외치면서 그분을 저희의 메시야로서 환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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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6장] 하나님의 아들 예수 (폭풍을 잠잠하게 하심, 거라사 광인, 야이로, 혈루증 여인)

성경/마가복음|2024. 8. 1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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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과 갈릴리의 이적들 (Miracles Around the Lake)

구체적으로는 갈릴리 호수 주변의 이적들

 

Q. 나에게 있는 능력 중 가장 놀라운 능력은 무엇입니까?

A. 저는 한번 마주쳐도 그 사람얼굴을 잘 기억하는 능력이 있어요. 예를들어서 저희 가족이 지난주 가족여행을 정선으로 다녀왔는데 화암동굴을 올라갈 때 모노레일을 탔습니다. 그 때 옆에 탄사람을 또 다른 여행지에서 만나면 기억하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서론>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 특히 갈릴리 바다라고도 불렸던 갈릴리 호수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길이갸 약 21km, 너비 13km 정도 크기 되는 호수입니다. 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과 제자들의 첫 번째 선교 활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그저 옷을 만지기만 했던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소녀를 살리십니다. 또 고향에서 설교하시고,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파송하시며, 떡 몇 개와 물고기로 많은 이를 먹이시고, 물 위를 걷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적’ 자체라기 보다는 그 ‘이적’이 갖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이적들을 보여주셨던 것은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 떻게큰일을행하사너를불쌍히여기신것을네가족에게알리라하시 니"(막 5:19).

 

1. 마가복음 4:35-4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요약: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쉬러 가시기 위해 배를 타고 이동합니다. 그때 갑자기 광풍이 불고 배가 요동하기 시작하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능력으로 잠잠하게 해주신 내용>

Q.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적은 언제인가요?

A. 최근에 말씀의 능력, 기도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시고 기도의 능력은 상황을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켜주는 것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요일 교과 제목이 폭풍을 잠잠하게 하심인데 최근 몇주동안 저의 마음에도 폭풍이 쳤습니다. 한 친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참 힘듭니다. 그 친구는 목회자라서 최근에 어떻게 하다가 불현 듯 그 친구의 이름을 보고 .. 갑자기 마음에 폭풍이 치는 것이지요..그 친구는 저랑 성향도 많이 다릅니다. 삶이 저보다 더 극적으로 변화됐고 친구들에게서 신앙적으로 더 인정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의 연약한 부분이기도 한데.. 저는 막내이고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다 보니까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조금 있는 편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저에게 있습니다.. 이 신앙적인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어떻게보면 조금 좋을 수 있는데 또 어떻게 보면 위험하기도 한 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을 떄, 백성들의 신앙적 존경심이 그 지도자들을 향해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것을 참지를 못합니다. 마음속에 질투가 있고 사람들의 존경을 자기가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도 그런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힘들었고 또 그 친구와 신앙적으로 부딪혔을 때 마음이 힘들고 했던 기억들도 떠올라 일하면서도 계속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했던 과거의 선택들부터 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힘드니까 진짜 할 수 있는게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주 이번주 교과 말씀을 공부하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축복하시려고 이렇게 은혜받는 귀한 직분을 주셨다고 생각을 다시한번 하게 됐습니다. 이번주 말씀을 보면 마가복음 6장에 제자들을 둘씩 둘씩 파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제 마음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하나님께서는 그친구와 나를 각기 다른 제자로 부르신 것이고 각각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도록 한 거구나.. 베드로 같은 제자도 있고 마가요한 같은 제자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걸 어제 말씀을 묵상하다가 탁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마음속의 폭풍을 잠잠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바꿔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참 놀라웠습니다.

 

시대의 소망 -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에 의뢰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조용히 쉬신 것은 “땅과 바다와 하늘의 주”의 입장에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을 그는 버리셨던 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그는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능력에 의뢰하셨다. 예수께서 쉬신 것은 믿음 곧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였으며 폭풍을 잔잔하게 한 그 말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예수께서 믿음으로 아버지의 보호 안에서 쉬신 것처럼 우리도 구주의 보호 안에서 쉬어야 한다. 제자들이 예수를 의뢰하였다면 저들은 평강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위기를 당했을 때 저희의 두려움은 그들의 불신을 드러내 주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예수를 잊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저희가 자기 의뢰의 절망에서 예수께로 돌아갔을 때 뿐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폭풍을 만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본받아야할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의뢰하고 능력 안에서 쉬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그 능력과 사랑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때 제자들이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셨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붙드셨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주변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수 있는 길은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붙드는 모습을 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2. 마가복음 5:1-20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

 

<요약: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후 육지를 밟으셨습니다. 그곳은 거라사인의 마을이었는데 갑자기 광인이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는데 그의 안에 있던 귀신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칩니다. 여기서 광인이 엎드렸을 때 사용됐던 헬라어 동사는 프로스키네오 인데 ‘경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가 귀신에 붙들려 당신을 향해 울부짖었지만 그의 심중에 속삭이는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놀라운 선교사가 됐습니다!> 

 

<영감의 교훈 읽기> 

"고침을 받은 두 광인은 그리스도께서 데가볼리 지방에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신 최초의 선교사였다. 겨우 잠깐 동안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을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예수의설교를한번도들은적이없었다.그들 은그리스도와함께있었던제자들이가르칠수있던것 처럼 사람들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가 메시아라는 증거를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들 은저희가아는것곧그리스도의능력에관하여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전할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340).

 

Q. 이 광인이 비록 귀신에 들렸지만 그의 마음속의 깊은 간구는 나를 치료해주세요. 나를 구원해주세요였습니다. 혹시, 이렇게 내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넉넉히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나요? 있으시다면 어떤 것 때문에 그런 확신을 갖게 됐는지 나눠볼까요?

 

3. 마가복음 5:21-34 야이로 그리고 혈루증 여인

 

<요약: 야이로라는 유대인의 회당장이 자신의 딸을 치료해달라고 옴. 치료하러 가는 중에 예수님의 옷자랅을 누가 만짐. 12년을 혈루증을 앓던 여인.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주심. 그래서 이제 야이로의 딸의 치료하러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전갈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간구를 예수님께 드리러 왔습니다. 빨리 예수님께서 가서 치료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손을 빨리 얹어서 그의 딸을 치료해주시면 좋겠는데 천천히 가십니다. 그리고 심지어 한 여인을 만났고 그여인을 치료해주십니다. 아, 이때 야이로의 마음은 그럴거 같아요. 빨리 갔으면 좋겠는데 치료까지 하시네. 어, 그런데 여인이 나았네? 내 딸도 나을 수 있겠다! 

그런데, 갑자기 전갈이 와서 딸이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빨리 가셨으면 딸이 안 죽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 예수님께서는 그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면서 달리다굼 하셨도 딸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이 것을 한번 자세하게 볼 필요가 있는데 <마가복음의 2번째 센드위치 구조> 이 이야기가 연달아 일어나고 이게 마가복음에서 2번째 센드위치 구조라고 합니다. 하나의 이야기에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끼어 있는 구조라는 의미입니다. 센드위치를 혹시 빵만 막으시는 분 있나요? 네. 센드위치는 같이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2이야기를 같이 한번 이해해보겠습니다. 회당장이라는 직분에 대해서 먼저 알아봅시다. 유대의 회당제도는 포로생활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기에 유래됐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있었고 예수님도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회당을 관리하는 사람이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예배를 주관하고 기도를 하고 율법서와 선지서를 읽고 설교를 할 사람을 택하는 일을 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보면 회당장이라는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습니까 낮은 사람이었습니까?

높은 사람,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신분이 낮은사람.. 그리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여성, 회당장 야이로는 남성, 혈루증을 앟던 여인은 자신의 치료, 회당장 야이로는 자식의 치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신분이 낮은자나 높은자나 여성이나 남성이나 자신의 구원이나 자식의 구원이나 모두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다.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심 - "예수께서는 침대 곁에 가셔서 당신의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그 집에서 흔히 쓰는 말로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의식이 없는 몸에 즉시 미세한 움 직임이 일어났다. 생명의 맥박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입 술은미소와함께열렸다.소녀는마치잠에서깬것처 럼눈을크게뜨고곁에있는사람들을이상하다는듯 이 쳐다보았다. 소녀는 일어났다. 부모는 팔로 딸을 꼭 껴안고 기쁨의 울음을 터뜨렸다"(시대의 소망, 343).

 

Q. 예수님을 따르고 믿으면서도 어떻게 삶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을 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예수님 은 우리에게 왜 그런 경험을 주셨다고 생각합니까? 

 

A. 계속 예수님을 의지하라고 그런 경험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결론: 마가복음은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 거라사인 지방의 광인을 선교사로 만들어주신 이야기,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 12년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회복시켜주신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누구냐고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대답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나의 구원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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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마가복음에 나타난 비유들

성경/마가복음|2024. 8. 2.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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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가복음 4장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이 비유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이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달인이셨고 실물교훈의 장인이셨습니다. 그리고 천연계속에서 언제나 진리를 이끌어 내셨습니다. 우리가 살펴볼 마가복음 4장의 비유도 예수님께서 동동 떠 있는 배 위에서 바로 앞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했던 말씀들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천연계의 환경에 둘러 쌓이셨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며 말씀을 전했던 듯 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공관복음서 (마태, 누가, 마가) 중 비유가 가장 적은 책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오늘 마가복음에 나온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요점들을 이해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씨뿌리는 자, 등불, 헤아림(척도), 자라나는 씨, 겨자씨의 비유 등 총 5가지 비유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오늘 씨뿌리는 자의 비유르르 중심으로 비유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함께 나누기 – 막4장 4-8절 읽기>

길가: 즉시 새들이 먹어버림

돌밭: 뿌리를 못 내림. 며칠 후 햇볕에 타버림

가시밭: 어느정도 선장, 가시에 막혀서 열매즐 맺지포함

좋은 땅: 작물의 일반적 성장과정을 거침. 시간은 제일 오래걸렸지만 열매를 맺게됨

비유가 주는 교훈- "씨뿌리는자와씨는다동일하다. 그렇게 하심으로 주님께서는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 리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기대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 하지못한다면그책임이말씀에있는것이아니라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 결과가우리의통제를벗어나있는것이아니다.물론우리 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 져 있으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일 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실물 교훈, 56).

예수님의 해설

예수님께서 이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한번 이번에도 성경을 함께 읽으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답 찾기 – 막 4장 14~20절 읽기>

 

정리를 해보면

 

뿌린씨: 말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우선, 땅이 4가지로 다 달랐습니다. 이 따잉 다르다는 것은 듣는 사람의 유형이 다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땅의 종류가 달랏듯 사람이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 새들이 씨앗을 빼앗아가는데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가는 사람 

돌밭: 기쁨으로 말씀을 수용하나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박새 속에서 넘어지는 사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제자도를 벗어버리고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지지않고 얕은 헌신을 가진 사람들, 즉 영원한 제자가 아닌 일시적 제자들을 일컫습니다. )

가시밭: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및 기타욕심 때문에 말씀이 막혀서 결실이 없는 사람. 이 부류의 사람들은 돌밭 사람들이 시련의 때에 떠나갔지만 오히려 좋은 때에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떠나는 사람드링빈다. 

좋은 땅: 말씀을 듣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입니다.

씨의가치를생각하라 - "그는 밭에서 씨를 뿌리는자 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오셨다.예수께서말씀하시는비유그자체가곧씨 앗이었으며 그는 이 씨로써 가장 귀중하고 은혜로운 진리들을 심으셨다. 씨뿌리는 비유는 너무나 평범하기에 사람들은 그 비유의 참 가치를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농부가밭에뿌리는씨를통하여복음의씨,곧파 종되면 패역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그 씨를 생각하기 바라신다"(실물교훈, 33)

7월 23일 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막4:9-12 읽어봅시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비유로 가르치신 것은 외인을 어둠 가운데에 두려 하신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다른 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행동과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9, 10을 인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장의 이 기별은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일깨워서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사야 6장에서 인용하신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막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입견과 마음의 완악함이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어떤 종류의 밭이 될지는 각자가 선택합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드릴지 아닐지도 모두 스스로 결정합니다. 결국, 선택은 각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Q. 성경은 흔히, 비유의 책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왜 사용하셨을까요?

A. 알기 쉽게 (반은 맞고 반은 틀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 "그는 비유로써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외식(外飾)과 악행을 견책하셨고 비유의 말씀으로써 골수를 쪼개는 듯한 진리를 싸셨다. 만약 그가 노골적으로 질책하셨더라면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않았을뿐아니라즉시그의전도사업을제지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밀정들이 손을 쓰지 못하게 하시는 한편 오류가 밝히 드러나도록 진리를 천 명(闡明)하셨으므로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그의 교훈 으로 유익을 받았다"(실물 교훈, 22).

네 마가복음 4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구절 즉, 비유를 다시 묻는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제자들이 결국에는 이해가 안됐으니까 다시 여쭤본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이렇게 비유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막 4:1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오늘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비유의 기능인데, 비유의 첫 번째 기능은 드러냄과 감춤입니다. 어떤사람에게는 드러내고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감추는 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36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대중에게는 감추시고 소수에게는 드러내신다는 사실입니다. 비유는 감추인 것을 간절하게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됐습니다.   

넉넉함과 빼앗김의 원리 – 비유의 기능 2번째

마 13:5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푸는  원리들을 설명해주신 후 제자들에게 물어봅니다. 깨달았느냐? 네 깨달았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게 바로 비유의 기능 2번째인 넉넉함과 빼앗김의 원리입니다. 비유를 깨달으면 넉넉하게 더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지만 비유에 대한 꺠달음이 없으면 있는 것 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넉넉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마다 마치 새것가 옛것을 그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마13:52)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즉, 비유를 한번 이해해서 넉넉하고 풍성하게 받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 사람들이 새것과 옛것, 즉 구약과 신약의 곳간에서 마음껏 복음의 진리를 내어쓰는 집주인인 것입니다. 

 

<읽어주세요! 결론>: 마가복음 4장의 다섯 가지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님은 성장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뿌려 주신 씨가 자라서 열매 맺고 큰 나무가 되기를 바라지만 사람의 완악함은 진리를 자라지 못하게 한다. 비유는 현실을 말하지만 모든 내용이 현실과 연결되지 않고 핵심을 통해 중요한 사상을 전한다. 예수님은 지혜롭게 비유를 통해서 모두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기별을 주신다.

 

깨달은 바: 달란트의 비유 + 씨뿌리는 자의 비유 + 자라나는 씨의 비유 등

 

예수님의 비유를 우리도 제자들처럼 알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의 마음밭을 잘 가꾸어서 우리의 마음밭이 좋은 밭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또, 마음밭이 좋은 밭이 된다는 것은 심겨져서 결실을 맺는다는 의미이므로 믿음의 결실을 맺어 하나님을 뵈옵는 날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는 음성을 듣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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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예수님의 심리치료, 안식일의 의미, 세리 계급

성경/마가복음|2024. 7. 2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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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가복음 2장의 성경구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마가복음 2장 1-12절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 요약: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분의 행동과 말이 사랑이었고 또 예수님께서 많은 귀신들린자들, 환자들을 치료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그날도 어떤 집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던듯 합니다. 이 모습은 이미 마가복음 1장 33절에서도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는 구절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있던 한 집에 갑자기 지붕이 열리고 어떤 병상이 내려옵니다. 한 중풍병자가 병상에 누워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4명이 중풍병자를 무리가 많아 예수님께 데려 갈 수 없음을 알고 지붕을 뚫고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의 발 아래 내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논쟁'이 생깁니다. 바리새인들이 '저 사람이 누구관대 죄를 사한다고 말하는가?'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시고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갑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놀랍니다.
  • 지붕을 뚫을 수 있었을까? 당시 이스라엘의 주택은 아래 사진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붕이 평평했다고 하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 사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무리를 헤집고 몇번이고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절망했습니다. 나의 치료자 예수님께서 바로 앞에 계신데... 조금만 나아가면 만나뵐 수 있는데...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 중풍병자는 친구들에게 요청을 합니다. 나를 지붕으로 데려가서 내려주라! 친구들도 이 믿음의 요청에 응답했고 지붕에 힘들게 올라갔고 지붕을 뚫고 환자인 친구를 내려줬습니다. 그렇기에 이 구절에서는 "저희의 믿음, 그들의 믿음"이라고 표현됐습니다.
  • 마가복음 2장 5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겠지만 선천적 환자와 후천적 환자가 있는데 중풍병자는 후천적 환자였습니다. 곧 그 자신의 죄악된 생활의 결과로 중풍 병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죄에 대한 후회를 거듭거듭 했고 그 후회에 의해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육체적으로 불편한 것보다 마음으로 죄에 대해 괴로워함이 더욱 컸기에 그의 심중의 무거운 심적질병이자 영적질병의 치유를 먼저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 마가복음 2장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 예수님께서는 이 환자에게 먼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고 서기관들에게 2장 9절의 말씀을 하신 후, 중풍병자에게 다시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것을 먼저(죄사함) 하고 그다음 쉬운 것(일어나 걸어가라)은 자동적으로 하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꼐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을 때 이 환자의 마음에는 용서의 평강이 임했고 하늘의 빛이 그의 얼굴에 빛났습니다. 죄로인한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자 육체적 고통이 사라지고 온몸이 변화된 것을 느꼈습니다. 죄인이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는 어린아이같은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환자는 더이상 아무 요청도 하지 않았고 행복해하며 누워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치유 뒤에 육체적인 치유가 있었습니다.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죄악된 결과로 육체적 질병을 얻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에는 죄의 불안과 죄에 대한 후회로 채워지지 않는 무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병을 치료자이신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가장 큰 것을 먼저 치료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 중 누군가가 마음의 병이 있거나 육체적 질병에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의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병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번뇌했던 시간들이 쌓여 얼굴에 수심이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사람들의 좋지 않은 시선을 경험하고 그것이 마음에 상처가 돼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주님은 그 모습을 어떻게 하시는 분이십니까? 가장 먼저 마음을 치료해주시고 어루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괜찮다.. 다 나앗다. 내가 있다"
  •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 - 마가복음 2장 1-12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들에게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할 수 있고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13-22 <세리 마태, 금식 논쟁>

  • 요약: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레위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레위 마태는 잔치를 엽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곳에 제자들과 함께 참여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세리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님께서 이에대해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레위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전해지는데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그가 딱 하나 갖고 간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세금 장부를 기록했을 때 썼던 '펜' 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그 펜으로 마태복음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 시대상으로 바라보는 '세리 계급' - 당시의 유대인들에 내려지는 격언 중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세리가 집에 들어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해진다 <Misahnah의 정결과 부정에 관한 Tohoroth> 이렇듯, 세리계급은 당시에 엄청나게 멸시 받는 계급이었습니다. 더 생각해보면, 세리 직업의 사람들은 당시 자국인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박 아래 있었을 때 자국민들의 세금을 걷어 로마정부에 갖다 바쳤던 로마 소속 공무원이었기에 우리나라로 치자면, 친일파였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세리들과 함께 식사했을까요?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서기관, 바리새인들보다 세리와 다른 공공연한 죄인들이 더 희망이 있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숨기지 않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영과 혼과 몸을 더럽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었기에 천국에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병적 상태를 깨닫고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6:3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에게 가서 고침을 받으려고 노력합니다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예수님은 자신이 부요하다고 하는 자들, 자신이 건강하다고 하는 자들이 아닌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7)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막2:23-28>

  • 요약: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격노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 믈라코트: 당시 유대인들은 '믈라코트'라는 규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 행동강령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믈라코트는 율법주의의 상징입니다. 이 규례에 있었던 것이 바로 '안식일에 벼 이삭을 자르는 일을 금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 다윗이 진설병을 먹음 -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던 이 사건은 삼상 21:1-6절에 나와있습니다. 사울왕에게 쫓기고 있던 다윗이 방랑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놉당에서 배가 고팠던 다윗이 제사장에게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어봅니다. 레위기 법에 의하면 안식일이되면 일주일간 근무했던 제사장이 서로 교대하면서 12덩이의 떡 덩이들을 교환하고 제사장들만 먹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날이 정확하게 안식일이라고 확인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떡은 대게 안식일에 교환을 하는데 교환을 하고 시간이 지났으면 분명, 제사장들이 다 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취해지지 않은 떡을 보면 그날이 안식일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렇게 먹었는데 하물며, 안식일을 제정하신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하는 말씀입니다. 
  • 안식일: 구약의 안식일은 예배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안식일 개혁에 관한 내용입니다. 신약에 나타난 안식일은 '영혼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살리는 날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안식일, 예수님과 함께하는 안식일은 '예배를 회복함과 동시에 사람을 살리는 날'로서 그 의미를 어떻게 복음적으로 구현해내야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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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장 "나를 따라 오라" (메시야 비밀)

성경/마가복음|2024. 7. 1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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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1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어부가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

오늘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그분의 사역의 원천이 기도임을 느끼며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기도의 삶을 살고자 말씀을 폈습니다.

1. 12제자의 공식적인 출범- 마가복음 1장 16-20

어부들을 부르심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각 2명의 어부를 따로 부르는 내용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엄청 좋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마가는 요한과 야고보를 그들의 아버지 ‘세베데’, 그리고 삯꾼들과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요한과 야고보가 시몬과 안드레보다 더 좋은 형편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가가 이 두명의 각기 다른사람의 형편이 한쪽은 가난하고 한쪽은 더 형편이 좋았다 라고 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경제적 여건이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삼으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다고 보시면됩니다.
  • 그리고 함께 이 성경절을 읽었는데 이 4명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이 어떻습니까? ‘과정이 생략’ 돼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단순하고 직접적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보면 이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행동이 약간은 우발적이거나 현실적으로 어려워 도피하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네. 이해를 돕기 위해 요한복음 1장 35, 40절을 살펴보겠습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사람과 함께 섰다가

(생략)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 이들(베드로의 형 안드레, 사도 요한)은 침례요한의 회개에 대한 기별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침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기전에 예수님에 대해 알았고 침례요한의 기별을 통해 마음을 준비했던 듯 합니다.
  •  그래서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우발적으로 따른 것은 아닌듯 합니다. 베드로 역시도 안드레가 예수님에 대한 소개를 했을 때 직접 그분을 뵙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마가복음에서는 즉시, 곧 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며 직접적이고 간결하게 사건을 서술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그래도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불러주셨을 때 그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즉시로 예수님께로 갔음을 말해줍니다. 마가는 요한과 야고보가 아버지를 두고 간것을 ‘버려두고’라고 표현할 정도로 예수님을 즉각 따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 말하는 “나를 따라오라”는 부르심은 ‘전임제자 (full-time)’로의 부르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제 예수의 학교에서 배우고 전도하고 이후에 교회를 설립하는 가르침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12제자처럼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 또는 평신도 목회자일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가 출범하는 상황에서 12제자의 헌신과 봉사는 절실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28절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눅 4:31-37)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 이 당시에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심에 권세가 있고 서기관들과 같은 형싱적인 설교와 가르침이 아니었기에 군중들이 놀랐습니다. 
  •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존재를 말해줍니다. 이 귀신들린자의 역할은 악과 선을 드러내주는 역할,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줍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마가복음에서 등장하는 신학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메시야 비밀'입니다. 메시야 비밀이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와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이 로마에 의한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존재로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 사역이 어려움을 겪게 되실 것을 피하시고자 이 자에게 '잠잠하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 - 기도 (막1장 35-39절)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자들, 귀신 들린 자들 그리고 소문이 퍼지면서 온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앞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피곤하셨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새벽 미명에 무엇을 하러 가셨습니까? ‘기도’를 하러 가셨습니다.
  • ‘미명’이라는 단어는 아닐 미자, 밝을 명자를 써서 아직 밝지 않은 때 즉, 새벽을 의미합니다. 찾아보니까 유대인의 관념으로는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였다고 합니다. 이 이른 시간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러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일상에서 늘 기도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던 예수님 (눅 6장 12절)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 이 구절은 이제 공식적으로 12제자를 임명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앞에 기도하셨던 구절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까 사역을 하셨을 때처럼 일상에서도 기도하셨고 하나님 사역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 기도하셨습니다.  이 구절에 예수님께서는얼마나 기도하셨다고 나오나요? 네 맞습니다. 밤이 새도록. 여기서 사용된 ‘밤이 맞도록’에 해당하는 단어가 의학적으로 쓰일 때는 밤새 병간호를 한다는 표현을 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 읽었던 마가복음 구절과 지금 누가복음 구절에서 조금 다른점이 있는 것 같아요. 아까 읽었던 마가복음 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러 가셨다고 나왔는데 지금은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럼 종합해보면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 우리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 하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쩌면 매일 기도시간을 정하고 기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때 겪게 되는 문제가 기도가 자칫 형식적이게 되거나 마음없이 기도드리게 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일입니다. 분명, 계획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틀에 갖춰서 기도하지 말고 장소를 바꾸거나 기도시간을 늘여보거나 하는 등의 노력도 필요할 듯 합니다.
  • 저도 아침에 기도를 매일 같이 드렸던 적이 있는데 시간을 정해두고 해서 나의 삶이 돼서 좋았는데 그안에서 더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기도하지 못해서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기도하는 장소를 바꿔보기도 했습니다. 집에서만 기도하다가 잘 안될 때는 산으로도 가보고 산책을 가보기도 하고 그러니까 확실히 좋긴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걸려서 그렇지.
  •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일상이나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나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기도와 실제 행동을 일치 시키기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은 애절하고 절박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홀로 천연계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일하던 곳에서 떠나서 들로 가시고 푸른 골짜기로 가서 명상하고 또는 산비탈이나 삼림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셨다. 이른 아침에 그는 흔히 외따른 곳에서 성경을 상고하거나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신 분이셨는데 기도하실 때 어떤 분이셨다고 나오나요? '그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대면하고 기도하고 대화하실 때 가장 행복해했던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으로 행복하십니까? 우리가 삶에서 조금씩 조금씩 기도로써 예수의 모본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시간이 행복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아래도 제가 좋아하는 내용의 책인데 한번 보시죠!

구주께서 신적 능력을 소 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필요를 느꼈다면, 연약 하고죽을수밖에없는죄인인우리는얼마나더열렬 하고 끊임없는 기도의 필요를 절실히 느껴야 할 것인가! ...그분은 금식하셨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열렬 한 기도와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굴복함으로 승리자가 되셨다. 마지막 시대에 진리를 믿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기도의 위 대한 모본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의 실천과 치유의 생애셨습니다. 위에 나온 성경구절들에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결코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에 그분의 능력의 원천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예수, 우리도 그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기도가 부족한 모습을 많이 봅니다.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조엘 비키라는 사람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의 기도생활을 연구한 후 "오늘날 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이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 루터는 매일 3시간씩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성경연구를 하기 가장 좋은 시간에 오히려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래 기사에서 내용이 좋아 인용했습니다!

루터의 친구인 바이트 디트리히 “한 번은 나는 그가 기도드리는 것을 볼 기회를 가졌다. 기도 속에서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얼마나 영과 믿음을 다해서 기도드리는지! 그는 하나님께 어울리는 최고의 경외심으로 기도했고 마치 아버지나 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망과 믿음으로 기도했다. 그가 하나님과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의 영혼에 뜨거운 열정의 불이 붙었다.”
 

전설적 기도생활 실천한 루터 매일 3시간, 규칙적 기도 - 아이굿뉴스

기도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조엘 비키(Joel R. Beeke. 1952~)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의 기도생활을 연구한 후에 오늘날 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이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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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모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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