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시78:38)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을 의미하죠. ‘진노’..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진노를 나타내시는게 말이 돼냐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야하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교과에는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고 나와 있어요.
Q 도입질문) 흔히, 성질 더러운 사람이 일을 더 잘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거 맞나요?
깨닫기 : 하나님의 진노는 피조물의 복락을 위하는 그분의 사랑의 합당한 표현이다.
느끼기 : 하나님은 자비하시지만 죄를 정당화하지 않으시며 십자가로 대속하신다.
행하기 : 그분이 진노하며 심판하는 뜻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한다.
1월 26일(일) 죄악으로 슬퍼하심
Q)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잘못 혹은 실수로 인해 화가 났던 적이 있나요?
본문 성경: 시편78편 40~60절
40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42 그들이 그의권능의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43 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소안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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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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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52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53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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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57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58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59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묵상)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나타내는 고린도전서 13장(사랑장)에는 ”사랑은 성내지 않으며“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왜 시편 78편에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일까?
네 우리가 여기서 올바로 이해해야하는 건 ‘분노’ 혹은 ‘진노’에 2가지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불의한 분노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분노입니다. 내가 미움 받았고 내가 불공평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화를 내는 ‘이기적 분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진노’는 공의로운 진노입니다. 즉, 나 자신을 위한 분노가 아니요 이스라엘 전체를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분노입니다.
그런데, 시편78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 공의로운 진노조차도 여러번 여러번 거듭거듭 돌이키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공의로운 분노인데 그것을 다 실행하지 않으시고 공의로운 분노는 잘못이 없는데도 계속 그것을 자제하시고 용서해주셨다고 나옵니다. 왜냐하면, 공의로운 분노 때문일지라도 사랑하는 내 자녀가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기를 극도로 자제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악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하심은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입장에 대해서 설명을 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을 한번 보면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중 곤경을 겪고 있을 때 교회의 대표자가 링컨 대통령을 찾아옵니다. 대표자는 링컨을 격려하면서 ”대통령 각하, 우리는 주님이 우리 편에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어요. 링컨 대통령은 이에 대해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이 어느 편에 계시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주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함께하신다는 증거와 그들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여주었어요. 하지만, 조금만 눈에 안좋게 보이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죄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슬퍼하셨어요. 링컨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늘 그들의 편에 서계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가 짧게 읽었던 시편 78편은 ‘아삽’이라는 사람이 쓴 시입니다. 아삽은 레위 지파 사람이었고 – 레위 지파면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 아삽은 마에스트로였다고 합니다. 지휘자죠. 다위 왕 때에 봉사하는 성가대가 3조가 이었는데 그 중 한명의 지휘자. 구약시대 성가대 최고지휘자.
아삽은 돌이켜야 할 것은 하나님이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임을 알고 시편 80편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시편80편 14-19
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6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7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면 참 어리석습니다. 그렇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게 그간 얼마인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기간이 얼마인데, 눈에 조금이라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또 자기 눈에 부정적으로 보인다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말씀을 계속 묵상해보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누구에요? 저입니다... 그래서 아삽이 시편 80편에 쓴 이 말씀이 위로가 되는 겁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아삽의 시가 나와 있어요.
아삽의 시가 어찌보면 참 뻔뻔하다고 할 수 있네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께 악을 범했는지 적었는데 또 이렇게 회개의 노래를 하니까요.
아삽이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오직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긍휼’은 영어로는 Mercy로 표현할 수 있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라함’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해요. 라함은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용되는 ‘긍휼’을 우리가 읽을 때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이라고 기본적으로 이해하면 될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젖을 빠는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가지는 반응 등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표현을 우리가 곧잘 보곤하는데 그럴 때는 이스라엘이 죄에서 돌이켰을 때 주어지는 용서의 은혜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자체에 분노하시기보다는 ‘악’에 대해 슬퍼하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악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곧 우리들을 헤치기 때문이죠. 인간은 언약에 성실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돌이키기만한다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교과는 말합니다.
<영감의 교훈>
회개의여지를주심-"이감사할줄모르는백성을 완전히 멸절시키지 않은 일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나타났다. 그분은 스스로 미혹을 당하도록 허용한 회중에게 회개의 여지를 주셨다. 주님, 곧 저들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지도자께서 이 일에 그토록 큰 인내와 긍휼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은,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와 겸비로 그분께 돌아갈 때, 그분께서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까지도 기꺼이 용서하신다는 증거로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교회증언 3권, 355).
1월 27일(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Q.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했는데 용서를 못한 적이 있나요?
본문성경절: 욘3:1-4:3
1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일어나 저 큰 성읍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니느웨로 가니라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니느웨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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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묵상) 왜 요나는 니느웨를 멸하지 아니하신 하나님께 불평했는가? 왜 그는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확신했는가?
<배경 설명>
니느웨라는 곳은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성경에서 흔히 ‘앗시리아’라고 오늘날의 이라크라고 합니다. 이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입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갈라진 시기에 여로보암2세가 왕위에 있을 때 활동하던 선지자였어요. 그런데, 당시 앗수르라는 나라는 실제로 북방 이스라엘의 인접지역에서 그들을 위협하던 국가였어요. 실제로, 40년후에 북방이스라엘은 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특벽히 요나는 이 앗수르 사람들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을 것 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민족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곳을 다 불살랐고 모든 성인 남자들의 손과 귀를 자르고 눈도 뽑아내고 극악무도하게 죽였어요. 또 소년들과 소녀들도 산채로 불태워 죽였고 왕의 유흥을 위해 사람들을 산채로 껍질을 벗기곤 했다고 합니다. 진짜 악하디 악한 사람들이었어요.
요나는 그 도시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게 하심으로 그 성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았을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인해 기뻐했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여김을 받을 가능성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평판에 눈이 멀어 그는 그 불쌍한 도시에 있는 영혼들의 무한히 큰 가치를 보지 못했다. 회개한 니느웨 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동정을요나는 몹시 싫어하고 성냈다.요나가 여호와께 여쭈어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1, 2)고 하였다.
요나는 다시 한 번 의문을 제기하고 의심하는 그의 성벽에 굴복하게 되었고 또 다시 그는 낙담과 좌절감에 억눌리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은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그는 살아서 그 성읍이 구원 받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났다고 느꼈다. 그는 불만족이 가득해서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를 보여준다.
"노하기를 더디하"심 또는 "오래 참으"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구절은 문자적으로 는 '코가 길다'로 번역할 수 있다. 히브리 관용구에서 분노는 은유적으로 코와 연관 되어 있는데, 사람이 화를 드러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코의 길이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 "코가 길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분이 노하기를 더디하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화를 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하나 님은 지극히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은혜를 아낌없이 풍성하게 베푸시면서도 죄 를 정당화하거나 불의에 눈 감지 않으신다. 그 대신, 십자가를 통해 죄와 악을 속하 심으로 하나님은 공의롭게 행하시며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분이 되신 다(롬 3:25, 26).
<영감의 교훈>
징벌과 자비가 완전히 부합되는 분 -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출 34:6, 7), ... 하나님 정부의 권위와 능력은 반역을 진압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보응하는 징벌을 나타내는 모든 일도 자비롭고 오래 참고 긍휼이 많은 하나님의 품성에 완전히 부합될 것이 다"(각 시대의 대쟁투, 541).
1월 28일(화) 의로운 분노
Q) 혹시, 내가 냈던 화 중에서 ‘의로운 분노’에 속하는 것이 있다면 나눠볼까요?
혹은 의로운 분노란 무엇일까요?
본문 성경1: 마21:12-13절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함을 짓밟고, 과부와 고아, 가난한 사람 들을 편취하는 방편으로 삼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분노인 '거룩한 진노'를 보이신다(마 21:13, 요 2:16 비교).
하나님의 성전은 은혜로운 용서와 죄인을 정결케 하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배가 됐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귀한 마음을 갖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착취해서 그것들을 자신들에게 이롭게 사용해 장사하는 소굴로 만들어 버렸어요. 원래 하나님께서 성전을 통해 뜻하신 바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렵혔고 악을 행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의로운 분노를 표출 하신 겁니다.
본문 성경2: 막10:13-14
13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본문 성경2에도 예수님께서 노하시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는 어린아이들이 오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의 어머님들께서 아이를 데리오 예수님께 나아오자 꾸짖었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오해받게 두시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의로운 분노를 다시한번 나타내셨어요.
본문 성경 3: 막3:2-5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완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셨어요. 여기서 예수님의 분노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강퍅한 것을 보고 슬퍼하시기 때문에 나타낸 분노였어요.
우리가 살펴본 이 3가지 예수님의 ‘의로운 분노’는 결국
다른 곳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대해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하려 하자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 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셨다(막 3:4).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막 3:5) 그 사람을 고치셨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분노는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슬퍼하시기 때문이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분노가 사랑의 공의로운 진노인 것과 같은 사랑의 의분이다. 사랑이 악에 대해, 특히 그 악이 사랑의 대상을 해할때 어떻게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악이 사랑의 대상을 해칠 때 사랑이 악에 대해 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 나님은 사람의 완악함에 슬퍼하며 사랑으로서 죄에 대해 공의롭게 진노하신다.
정당한 분노 -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정당한 분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수치를 받으시 고당신의사업이누명을쓰는것,무죄한자가억압당 하는 것을 볼 때는 의분이 심령을 격동시킨다. 민감한 도덕심에서 나온 이런 분노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일상 의 도전에 대해서 분노나 적개심을 품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사탄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하늘과 조화되기를 원한다면 원한과 증오심이 심령에 서 추방되어야 한다"(시대의소망, 310)
결론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생각하는 진노와 다르다. 진노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불의의 진노이고 또 하나는 공의의 진노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진노가 곧 공의의 진노이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그 죄로 인해 그 자녀까지 죽게 만드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진노 역시도 하나님께서는 거듭거듭 돌이키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자녀들이 고통스러워 하실 것을 차마 못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듭거듭 진노를 돌이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품성이시다. 반면, 이기적 진노란 요나가 니느웨로 기별을 전하러 갔을 때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한 것. 그것이 곧 이기적 분노에 해당한다. 요나는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취급 받을 까 곧 자신이 거짓 선지자로 여겨질까하여 하나님께 분노한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로운 진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진노조차도 우리를 위해 거듭거듭 돌이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이키고자 하는 영혼을 '긍휼히'여기신다. 그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은 곧 엄마가 아기를 돌보는 그런 측은한 마음이다. 언제라도 하나님께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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