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첫 성전, 두번째 성전

성경/말씀 묵상|2024. 4. 4. 11:09

예루살렘의 첫 성전은 그 외관의 아름다움이 상당했다. 그러나, 솔로몬이 완성했던 첫 성전은 파괴됐다. 그리고 뒤이어 완성된 두번째 성전은 그 외관이 첫 성전보다 못했다. 사람들은 첫 성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광스럽지 못한 두번째 성전을 보고 울었다. 그러나, 두번째 성전은 영광스러울 것이라고 약속됐다. 그리고 두번째 성전이 더욱 영광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그곳을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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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부활

성경/말씀 묵상|2022. 7. 4. 10:25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곧바로 살리러 가시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했다.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믿음을 주려고 하셨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다.

약간 원망섞인 목소리로 "예수님이 계셨다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원망섞인 목소리였지만 믿음의 목소리가 아닌가 예수님이 계셨다면 죽음이 없었다니

그리고 마르다는 덧 붙였다. "그러나 주께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시던지 그대로 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고백한 마르다에게 나사로의 부활은 물론 의인의 부활로 이끄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재림의 때를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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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양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성경/말씀 묵상|2021. 10. 20. 12:27

동물 중에 양은 가장 겁이 많습니다. 그리고 방향 감각도 둔하고 시력도 나빠 길을 잘 잃습니다.

 

불과 10미터 안팎의 물건만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어 바로 앞에 낭떠러지가 있어도 피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합니다. 또한, 양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발톱도 없습니다.

 

 

게다가 느리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양은 절대적으로 목자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목자는 바위틈에서 양을 노리는 맹수들의 습격에 양을 지켜야 하며 약탈자들의 공격에도 늘상 대비해야 합니다.

래서 목자는 낮이건 밤이건 눈붙일 겨를 없이 양을 돌봅니다. 이런 목자의 수고는 야곱이 라반의 의심에 대해 말했을 때도, 잘 드러났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31:40) 야곱의 말처럼 목자는 눈 붙일 겨를 도 없이 양을 돌봅니다.

 

 

생명을 걸고 양을 지키기에 양의 생명은 목자의 생명과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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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막 5:21-43, 옷자락에 전해지는 사랑

성경/말씀 묵상|2021. 3. 26. 23:21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12년간 혈루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혈루증이란 자궁출혈을 일컫는 병으로 여성분들이 기본적으로 하시는 '생리'(월경)과는 달리, 불규칙적으로 출혈이 일어나는 병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 재산을 탕진해버렸습니다. 전 재산을 탕진하고도 얻었던 대답은 당신의 병은 불치병이라는 대답 뿐이었습니다.

 

<찬양 들으면서 읽어보세요 ^_^>

이 여인의 삶 만큼이나 비참한 삶이 있을까요? 불편하고 고통스러워서 어디 함부로 다니지도 못하고.. 1년도 긴 세월인데, 12년간을 그렇게 살았다니...

 

그런데, 이 여인이 한 사람에 대한 소식을 듣고 희망을 품게 됩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께로 간 환자 중 어떤 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온 희망을 예수님 만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있는 곳으로 재촉해서 떠났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에게로 가기만 한다면 자신의 병이 치료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가르치시던 해변에 갔으나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다시 레위마태의 집에서 예수님을 또 따라갔으나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시는 도중에 그 여자에게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눈 앞에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무리에 둘러싸여 걸어가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다시 예수님의 앞에 설 수 없음을 순간적으로 빠르게 깨닫고 그분의 겉 옷만을 만져도 구원을 얻겠다는 믿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모든 믿음을 걸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때, 놀랍게도 그녀의 고통과 쇠약함은 완전히 치유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질병이 치유가 됐다고 착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녀의 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옷자락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능력을

붙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인말고도 당시 예수님의 주위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정탐꾼들, 예수님의 이적에 놀라서 따라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받은 사람들, 무리에 이끌려 따라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12년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런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분을 향한 간절한 마음, 진실된 마음이 곧 심령이 가난한 마음이요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마음 없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무용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을 표면적으로가 아닌, 참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유일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동여멥시다.

 

여러분이 혹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라면, 삶에 절망이 가득하다면, 혈루증을 12년간 앓던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도해보세요. 저 역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삶에서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 삶이 변화됐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끝이 있는 세상입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그분을 한번 믿어보세요. 절대 후회하심이 없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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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과 제자들,마 14:22-33

성경/말씀 묵상|2021. 3. 20. 19:41

마태복음 14장:22-33 에는 예수님의 해상 보행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해상 보행 이야기의 배경에 대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해상보행을 하시기 전에 먼저 하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곧 우리에게도 흔히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이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던 무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입니다. 그 이적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 혹은 식욕적 방종을 위해서 하시지 않고 육체적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우실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더욱 영적으로 하나님을 붙들도록 의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적을 맛 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와는 다르게 그 이적을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 능력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런 권위 있는 자리에 앉기 원하시지 않는 것을 아시고 자신들의 계획으로 능력 있으신 예수님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습니다. 이 일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함께했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이 비난을 받으시는 것을 봤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속이는 자'라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항상 큰 시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께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자신들의 위치도 높아지고 이제는 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속이는 자'의 제자라는 누명을 안 써도 됐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서 높은 위치에 오르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로 주의를 끌거나 존경을 얻고자 조금도 노력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무리와 제자들은 의논을 거쳐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의도를 아시고 위엄있는 말씀으로 그들의 계획을 멈추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랫동안 예수님께서 높은 위치에 오르기를 바랐으나 이전에 없던 위엄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볼 때, 그분을 만류할 수 없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3절에는 무리를 따로 보내시고 예수님께서 홀로 산에 기도하러 가신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시간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예수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사람들을 위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당신의 사명의 본질을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낼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자들과 무리가 예수님의 거룩한 사명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동안 제자들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더욱 예수님께 왕위에 앉으셔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못했음을 후회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자들은 영적인 시험에 더욱 깊이 빠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 보여주신 은혜와 선물을 잊고 우울해했습니다. 그때, 이전에 제자들을 덮쳤던 것과 같은 강풍이 제자들이 탄 배를 덮쳤습니다. 그들은 강풍이 그들이 탄 배를 때릴 때마다 바다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 격렬하게 노를 저었습니다. 

 

그들은 밤 사경까지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그들의 힘으로는 더 할 수 없었음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더라면'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계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절대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강풍과 싸우는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제자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빛이 될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로 보시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당신의 자녀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듯,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제자들을 바라봤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속 야심이 가라앉고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렸을 때,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힘겹게 어렵게 슬프게 꿋꿋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밤새 지켜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겸손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옆에서 지키시는 예수님을 쓸쓸히 내버려 두지 마시고 믿음으로 예수님과 만나는 귀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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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 거라사의 광인, 막5:1-20, 검은 사제들 성경구절

성경/말씀 묵상|2021. 3. 14. 15:21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5장1절-20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폭풍우를 물리치고 해변에 닿게 됐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에서 격노한 태풍 및 파도를 만났다면 지상에 닿자마자 그들은 미친 사람들을 맞딱드리게 됐습니다.

두명의 광인은 마치 예수님과 제자들을 갈기갈기 찢기라도 할듯이 달려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도망치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광인들이 있던 곳을 바라봤습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는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서계셨죠. 예수님꼐서는 이 두명의 사람안에 있는 사귀에게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두명의 광인은 원래부터 광인이 아니었고 사귀의 속박에 의해 광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엎드렸으나 그들을 속박했던 사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사귀들은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자신들을 이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에서 먹이를 먹고 있던 돼지떼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사귀가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돼지 떼는 미친 듯이 낭떠러지 아래로 나가떨어져 모두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더보기

*이 부분이 영화 검은사제들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영화에서는 돼지 떼까지는 아니지만 돼지 떼에 악령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해당 영화를 시청하시면 잠을 못 잘 수도 있으니 심신이 약하신 분들은 보지 않으실 것을 권합니다.

거라사의 광인 두명에게 있던 사귀가 돼지 떼로 옮겨 죽게 됐습니다. 그리고 거라사의 광인 두 사람은 새로운 광명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처참한 삶에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거라사의 광인 두 사람 외의 다른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돼지 떼에 사귀를 옮겨 돼지 떼가 죽게 되자 거라사의 주민들(돼지의 주인)은 자신들에게 경제적인 피해를 입힌 예수님에게 그 지역에서 물러가 줄 것을 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그들의 현세적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하고자 그들의 재산을 이용했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 했습니다. 현세적 이익을 좇는 삶이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삶보다 더 큰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순종하면 세속적 이익이 손실당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자고 입을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포기하면서까지 세속적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리고 그 삶이 쌓이고 쌓인다면 우리는 나중에 하나님께 되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지금부터라고 가장 우선 순위에 하나님을 두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성령께서 이 일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청에 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원했던 광인 두 사람에게 "너희들이 이 곳에서 할 일이 있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실 수 없었기 떄문에 그들에게 거부감이 없는 치유함을 받은 그 두명을 선교사로 그곳에 파송하신것이었습니다.

이 두명의 치유함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치유해주신 예수님과 평생을 함께 해주시기 원했으나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몸에 가진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갖고 그 지역에서 사명을 전할 때, 그들에게 더 큰 영적 축복이 따를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워 지는 길은 구원의 소식을 전파할 때 이뤄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직접 보고 들은 말씀과 경험을 우리가 있는 곳에서 전해야 합니다. 이 일들이 부족하기에 지금 세상은 사랑이 없고 점점 멸망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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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 마태복음 8장 23절-27절, 예수님의 믿음

성경/말씀 묵상|2021. 2. 21. 21:48

마태복음 8장 23절~27절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무리가 배를 타고 이동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등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피곤과 시장기에 지쳐 낮잠을 청하셨습니다. 이때, 갑자기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탄 배에 큰 폭풍이 몰아칩니다. 번개도 치고 심지어 물이 배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강인한 어부들은 물을 안간힘을 쓰며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폭풍은 거세지고 바람은 더 세찼고 파도는 배를 집어삼킬 듯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불렀을 때, 바람 소리에 그들의 소리가 묻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늘의 평화를 나타내시며 낮잠을 주무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사옵나이다"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리고나서 다시 그들의 최후의 힘을 다해 노를 저으려할 때, 예수님께서는 두손을 높이 드시고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자 갑자기 성난 바다와 거센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두려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다고 하셨을까?

일반 사람이라면, 그 모습은 믿음이 적은 모습이 아닐 텐데, 그리스도인이기에 제자들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적다고 표현하신 듯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바다에서 몸담아왔던 그들이었기에 그들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조금 난처해지자 예수님을 불렀으나 바람에 음성이 묻혔을 때, 그들은 다시 예수님께 다가가거나 예수님을 더 큰 소리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깨우기까지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깨웠을 때 조차도 그들은 예수님께 한마디만 하고는 다시 노를 저으려고 했습니다.
 
다시 노를 저으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그때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죠.

믿음은 나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네. 우리가 살펴봤던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겉으로만 의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정말로 믿었다면 예수님을 깨우는 것이 먼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바빴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살펴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경을 헤맬 때, 편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을까요?
여기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의지했으나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에 그분 자신을 맡겼기에 그 죽음의 찰나에도 하늘의 평화를 나타내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도상에서도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과 채찍을 맞으면서도 온유한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셨죠.

 

 

이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힘을 믿고 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돌보심을 믿는 것.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편하게 안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늘의 평화를 소유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악인은 악한 마음을 품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도 성경에서는 악인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0~21)
 
 
저도 요즘 악인 같은 모습이 많이 나타납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금도 나를 돌보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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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 마태복음 11장 28-30절,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성경/말씀 묵상|2021. 1. 23. 17:09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 저마다는 각자 삶의 짐이 있습니다. 직장, 가정, 인간관계, 승진문제, 경제문제등 우리에게는 짐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도 '짐'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위에 열거한 모든 문제들은 다 짐일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절대 '짐'이 아니거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누가 나한테 직장문제, 가정문제, 인간관계문제, 승진문제, 경제문제등을 다 떨궈놨습니다. 이것들은 짐이 맞죠? 하지만 그 옆에 예수님이 계시네요? 그 예수님은 '짐'이 아니라 이 모든 짐들을 쉽게 가지고 갈 수 있는 '카트'같은 존재입니다. 아니 카트에 비교할 수 없겠죠. 그만큼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평탄하고 평강하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삶의 짐을 우리는 예수님께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삶의 짐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는 예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을 향해 목이 쉬도록 찬양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예수님과 영적 교재를 나누기 위해 말씀을 깊이 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자연을 거니는 것 또한 예수님께 짐을 내려 놓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행동이 결국에는 나 혼자 그 문제를 풀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풀겠다, 예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야 할 때에 그렇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고 나의 무가치함과 무능력함을 예수님께 고하고 그분께 매달립시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예수님께 내려놓을 때 우리의 영혼은 쉼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곤경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알 때 우리의 무능력함을 알 때 우리는 가장 강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야말로 우리가 가장 강하게 예수그리스도를 붙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멍에'는 봉사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멍에'는 일반적으로 농사지을 때 소가 조금 더 쉽게 일하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우리를 위해 봉사하는 소가 '멍에'를 매고 좀 더 쉽게 봉사를 했듯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봉사'를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멍에를 매야합니다.


보기에는 좋은 '봉사'이지만 그 '봉사'가 나의 의지대로 하는 일, 내 생각대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사탄의 일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하나님의 인도함을 구하여 한 걸음 한 걸음 그분께서 주시는 말씀과 음성대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예수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봉사'의 의무를 위해 부름을 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예수그리스도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전하고 봉사를 위해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의 율법을 멍에로 메고 봉사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가 멍에로 멜 때 그 율법이 우리를 우리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고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인간의 몸으로 봉사의 멍에를 매셨죠. 예수님은 졸리도록 피곤하셨지만 자신에게 오는 환자들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치료하셨고 제자들을 위해 모본을 보이셨고 또 십자가에서 매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마침내 돌아가셨을 때 무덤에서 안식하셨죠.


그렇다면, 예수님을 이토록 봉사의 삶으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에 빠진 인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에서도 그렇고 삶에서도 그렇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물론 세상에 살면서 인간으로서 어떻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반문하실 수 있겠지만 그런데도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봅시다.


우리는 눈앞의 시련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련을 통해 사람을 단련시키는 데 사용하시고 그 시련을 통해 우리를 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요셉' '다니엘' 등 성경의 많은 인물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어요.


근심은 맹목적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처음과 끝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백 가지 길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업과 영광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평탄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기도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 중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쨌든 이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야 하고 우리가 속한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죠.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겠습니다.


불안이 일어나는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구하고 거듭날때에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오직 예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봉사의 의무를 질때, 예수님의 선물을 사용해 생애의 짐이 가볍게 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할때 완전한 쉼이 있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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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 마태복음 11장 28-30절, 가끔은 쉬고 싶을 때

성경/말씀 묵상|2021. 1. 16. 23:37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장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에 위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삶에 지친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지만 무척이나 피곤한 생애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오직 예수님을 힘입으로써만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이라는 마음의 화평, 마음의 평강을 의미합니다.

여행을 간다고 해서 돈이 많다고 해서 사람이 많다고 해서 내 마음에 평화가 생기고 마음에 안식이 생기는 것이 아닌 우리를 창조하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마음에 있을때 우리는 안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세상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끊어졌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과 소망을 갖고 이 죄스러운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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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는데, 저나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나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짐이 있습니다. 그짐이 무거울 수도 가벼울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짐'중 가장 무거운 죄는 무엇일까요? 인생의 짐일 수 있고.. 혹은 가족이 짐일 수 있고 또 내 자신이 짐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죄'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합니다.


한번 생각해보면, 나의 삶의 짐이 '직장'이나 아니면 '가족'자체라고 한다면, 직장에서 버티면 되고 가족들이랑 어렵지만 살아가는 것을 통해 어쨌든 '해결'은 가능합니다. 물론 다 힘들지만요 :)


하지만, 나의 죄(꼭 재판에 의해 죄라고 규정된 것 외에도)로 인해 누군가 고통을 받고 내가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가령,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는 '죄'를 범했고 상대방은 그로 인해 평생을 힘들어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위에서 언급했던 '가족'과 '직장'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죄'의 짐을 우리에게서 제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우리의 죄의 짐을 가져가신 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어깨에 있는 가장 무거운 짐 또한 가져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의지하는 우리들에게 '쉼'을 주실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짐 뿐만 아니라 슬픔의 짐과 염려의 짐 피로한 짐 고통의 짐...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짐을 지실 수 있고 지시기에 넘치시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죄의 짐과 더불어 삶의 모든 짐을 당신께 맡기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짐을 맡기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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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족이 힘들게 할까,나는 왜 가족이 힘들까?

성경/말씀 묵상|2020. 12. 24. 12:21

연약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회사에서 힘들게 할 수도 있고 친구가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관계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어딜 가나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가족이 나를 힘들게 한다면.. 그것보다 힘든 일은 없을 듯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46-50절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인간적인 관점으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모습을 불편하게 생각했고 왜 불필요하게 예수님께서 논쟁을 만드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용납할 수 있는 것들만 말했으면 그렇게 논란이 됐겠느냐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의 이런 태도에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에 대해 지나친 간섭과 비판의 태도로 나아갔고 이는 큰 적개심으로 예수님을 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삶중 형제들의 적개심만큼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한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 관계에 의한 가족임에도 형제들에게 어떤 따뜻한말도 어떤 사랑스러운 말도 듣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형제들때문에 자주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이때 형제들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봤지만 위로는 커녕 오히려 더 모진말을 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형제들의 비난은 예수님의 골수를 쪼개는 듯 했고 예수님의 영혼을 피로하게하고 지치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가정에서 평안한 쉼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겠지만 지금 시대에 가정에서 평안하지 못하다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직장에서 치이고 관계에서 치이는 현대인들인데.. 가정에서조차 자신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정말 집에 들어가기 싫었을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과 교통하심으로 위안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정에서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하셨기에 그분처럼 가정에서도 오해받고 어려워 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정에서 교통을 겪으셨기에 자신을 보고 살라며 그분들을 위로하십니다. 예수님은 가정에서 어려워 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 힘을 내셨던 것처럼 가정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을 우정으로 삼고 당신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한 예가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중에 가난해서 자신의 기업을 팔고 자기 자신도 종으로 팔렸어야 할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속량할 책임은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죄로 인해 잃어버린 바 됐으나 우리 죄에 대한 속량과 하늘 유업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형제요 가족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가까운 친족이라면 예수님의 형제가 되는 사람들도 우리의 형제입니다. 이 중에는 사회적 약자들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형제로 생각한다면 이는 이방인과 다를바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 거저 받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 안에 거하여 거저 받은 사랑으로 우리의 형제되는 모든 사람들을 친절한 사랑으로 대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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