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돌아가자

성경/말씀 묵상|2020. 8. 16. 21:40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 그분께서 받아주십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에게 가서 우리의 죄를 씻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정신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선물을 받을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병자들을 치유하셨는지 설명해줍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사람을 치유했다고 말합니다.

 

38년간 걷지 못했던 베데스다의 환자를 떠올려 봅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라고 말씀하셨을 때, “당신이 나를 온전하게 하시면 내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을 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완전하게 나았다고 믿었고 걷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했고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환자의 모습 그대로 말씀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베데스다의 환자가 믿었을 때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셨듯 우리가 믿을 때 정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됐다고 느껴질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우리를 정결하게 해주시고 당신과 같아지게 해줄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생애를 살 능력을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게 되면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의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당신을 바쳤다면 다시 되돌아가지 마세요. 결코 예수님의 품을 떠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그분의 성령을 주실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켜달라고 구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전에 변화의 증거를 보여야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흔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거룩한 생애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작을 성령을 구함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죄와 싸울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라야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죄인의 모습일 때 지금당장 당신께 나아오시길 원합니다. 우리의 어리석고 볼품없고 연약하고 더러운 모습 그대로 죄를 한탄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는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정결하게 해주시고 의롭게 해주시는 것이 그분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죄가 많은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을 영접하여 강하고 순결하고 의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정결한 옷을 입히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기를 원하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같이, 네 죄를 안개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사야 4422)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느낄 때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는 성령하나님께서 죄인을 아버지의 품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특별한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죄가 많고 그 죄가 클지라 하더라도 마치 집을 나간 아들을 멀리서 지켜보며 기다리며 오늘오나 내일오나 마중나가서 기다렸던 그 아버지처럼 아니 그보다 비교도 안되는 큰 사랑으로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520)

 

아직도 의심이 되십니까? 의심과 두려움이 걷히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지금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귀한 아들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시다.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기도하세요.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께 나아가 그 축복을 받으세요.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심을 믿읍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켜 그분과 같이 완전한 생애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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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헌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성경/말씀 묵상|2020. 8. 14. 16:16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모두 죄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상태를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죄악적인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떠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쳐주시고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주시기 위해서는 우리를 전적으로 변화시키셔서 새로운 욕망과 습관을 갖게해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여기서 헌신이란 우리의 죄된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렇게 큰 죄인입니다. 저는 죄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저의 죄와 저의 죄된 모습을 아버지께 바칩니다. 부디 저의 죄를 책임져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미워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진정으로 헌신하는 기도이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그분께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된 자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기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 스스로는 죄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기에 죄에 무너지고 하나님께 굳은 결심을 하여도 매번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에 자포자기 하고싶을떄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망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자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을 따르게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나 그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선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그 능력만 올바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우리 삶의 선택들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마음을 거룩하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선택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수는 있습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의미는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나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울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으로 가르쳐주시거나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시거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거나 섭리로써 말씀하실것입니다. 우리는 그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하면 됩니다. (순종) 그리하면 우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영으로 지도함을 받게 될 것이며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과 같아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안에 사시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는 행복으로 우리는 더욱더 마르지 않는 샘물에 가려고 합니다. 

 

 

저는 헌신의 의미를 이제까지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고 선교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헌신이란 우리의 죄된 마음을 드리는 것이자 우리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사탄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지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된 마음 그대로 자신에게 나오라고 하시니 그 은혜를 인하여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스스로 사랑할 능력도 없으니.. 그저 하나님을 진실되게 섬기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을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죄된 모습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헌신입니다. 여기서 섬김은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우리를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아는 하나님 섬기기를 어렵게 합니다. 본성자체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수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반만 세상에 속하고 반만 하나님께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여 주신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올바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크나 큰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으시고 순종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섭리로 역사해주시며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그대로 선택(순종)하면 됩니다. 하늘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순종해 그분의 계획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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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란 무엇인가

성경/말씀 묵상|2020. 8. 14. 16:1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를 잘못이해하고 있습니다. 저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지었을때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다신 이렇게 행동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거나 죄책감에 짓눌러 일정기간 하나님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의 '회개'는 죄의 결과를 두려워한 회개이지 죄 자체를 슬퍼하고 한탄하는 회개가 아닌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내가 이 죄를 지었기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안좋은 결과를 주실거야 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살펴볼까요? 선지자 발람이 있습니다. 그 발람 역시 하나님앞에 큰 죄를 저질렀지만 회개했습니다. 가룟유다도 예수님을 팔았지만 이내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회개는 죄 자체를 슬퍼하며 한탄하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즉,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0)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에 가장 선두에 위치시켜 그를 죽였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살인죄에 간음죄까지 더했으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정말 가증한 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이 왔을때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해 핑계대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하나님앞에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 그자체를 슬퍼했으며 한탄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는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떤 벌로 자신의 죄를 벌하시더라도 '받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 의해 크나큰 고생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압살롬을 사랑했고 하나님께 자신이 범죄한 죄가 자신앞에 있었음을 알았기에 그의 인생에 임한 극심한 시험을 '복종'했습니다. 그때의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말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시절 골리앗을 무찌를때보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임한 시험과 고난을 순종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진정한 회개란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한탄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그분께 죄송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처음에야 양심이 올곧아 나의 죄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슬퍼할 수 있겠으나..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에 죄에 죄를 더하고 계속 반복해서 죄를 짓는동안 마음이 강퍙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마음은 '죄'로 물들고 병들고 더럽혀져 예수님을 못박게한 나의 죄를 스스로 슬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진정한 회개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회개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회개는 오직 우리에게 영적인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께로서만 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의 능력이 사람을 진정한 회개로 이끌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셔서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올바른 갈망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성령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구하여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마음속에 깨닫게 해주실때 우리는 그분의 놀랍고도 깊은 사랑에 마음이 감동하여 나의 죄의 깊이를 어느정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죄 사유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속에 품은 모든 악한 생각들도 죄이고 그 죗된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동으로 이어지는 열매들 역시 죄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행동이 모두 하나님께 일치되어야 우리는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일입니다.

 

즉,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안에서 완전하게 살기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여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아야 하고 죗된 행동이든 죗된 마음이든 '죄'를 지었을때... 사탄의 '니가 그러고도 그리스도인이냐'하는 음성을 듣지 말고 

 

"나 죄인 맞아...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책임지셨어. 그래서 나는 그 예수님을 믿을거야"

 

라고 말해야 하며 유대인들이 흠없는 어린양에 자신들의 죄를 전가시켜 하나님께 제사드렸듯, 우리의 죄를 진정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에게 가지고 가서 그분에게 바쳐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죗된 마음이 들고 죗된 행동을 했을때... 주저 않지 마세요. 우리는 죄인이기에 넘어질 수밖에 없고 엎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아십니다. 

 

죄를 지었을때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지체하지 말고 성령을 구하여 죄를 슬퍼하고 한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여 하나님께 '순종'을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마음과 행동의 일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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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진심으로 고백함

성경/말씀 묵상|2020. 8. 10. 20:23

우리가 타인에게 잘못을 했다면 이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하고 잘못한 대상에게 사과를 하지 않으면 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을때 하나님께도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이웃은 하나님께 속한 자녀이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인에게 죄를 지었다면 이는 우리가 하나님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앞에 죄를 지었을때.. 우리는 자신을 겸비하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영혼은 자신의 죄에 대해 변명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인류 최초로 범죄 했을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나에게 그 나무의 실과를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이렇듯 하나님을 탓하고 하와를 탓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여쭤보시자 하와는 뱀을 탓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가 어떤 큰 희생을 가져올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피하려고 했고 숨으려 했고 변명하기에 바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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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죄를 변명하고 싶은 욕구는 사탄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모든이에게 그러한 욕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고백을 받아 주지 않으실 것이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결백을 보이려고 노력하거나 변명을 늘어 놓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도록 이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전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큰 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괴수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죄에 대해 감추지도 않았고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분명하고 단호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가납하심을 받는 첫째 조건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지 않느다면 이는 용서를 위해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 깊이 토로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들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 토함으로 진정으로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이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죄'에 대한 진정한 고백을 하지 못할까...?

 

이는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아래 우리가 눈을 뜬다면 우리의 죄를 분명히 보여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진정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여 우리 죄를 바로 볼 수 있도록 간구할때 성령께서 우리의 눈에 안약을 발라주셔서 우리의 죄를 분명히 보여주실것입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우리의 죄들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토록 흉악하고 더러운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꺠닫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값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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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필요한 우리

성경/말씀 묵상|2020. 8. 9. 16:32

죄가 무서운 이유는 그 결과가 단 하나로 끝나지 않느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죄도 지었지만 그 죄로 인한 결과로 사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던 그들이었지만 죄를 지은 이후로는 자신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에게서만 행복과 거룩함을 느꼈던 그들이었지만 죄를 지은 후로는 거룩함에서 행복함을 찾지 못했고 하나님으로부터 피하려고 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타락한 품성을 전해내려받은 사람들이기에 결코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스스로 거룩해질 수도 없으며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에 물들었으며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조차 없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어도 행복하지 않으신가요? 교회를 가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십니까? 선한일을 해도 마음의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으세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온 마음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난 그 역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알았기 때문에 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고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거룩하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야합니다.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여 예수를 통해 하나님에 이르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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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마음에 평안과 은혜가 느껴지기 보다는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기도를 하며 다시 말씀을 천천히 살펴봤다. 그랬더니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인류는 타락했고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사탄에 속하여 거룩함하나님에서 행복함을 찾지 않는 존재가 됐다. 나 역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의 생각대로 신앙을 하고 때때로 사탄의 인도함을 받는 모습이 나타남을 고백한다. 또한 말씀을 보더라도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순수한 행동이 아니라 나의 자아 만족을 위해 말씀을 보고 기도를 했던 경험도 참 많았다..

 

나는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하나님께서만이 주시는 행복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나의 삶에 조금씩 조금씩 나타났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기도를 듣기 원하실까?

 

나의 생각과 자아에 대한 미련을 예수님께 가져가고 싶다. 성령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을 구하여 다시 하나님께로 걸어가보고 싶다. 그동안 참 내 힘으로 많은 일들을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도록 더 많이 기도해야 할 듯 싶다. 이 기도의 마음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순수한 열망으로 말씀과 기도로 삶을 살고 싶다. 이렇게 묵상을 마칠때가 되니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이 내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분인지 가르쳐주심에 참 감사하다. 내일은 조금 더 하나님께로 가고 싶다. 아니 오늘 남은 시간 동안에도..

 

..예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죽은 영혼에 새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있고 우리를 하나님과 거룩함으로 이끌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은 하늘과 다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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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성경/말씀 묵상|2020. 8. 9. 16:15

자연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자

 

 

자연과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 세상에 안 비추는 곳이 없는 햇빛은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놀랍고 절대적이며 공평한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비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산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바다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넓으신 분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하늘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하늘이 파란색이 아니고 구름이 흰색이 아니면 우리에게 하늘을 보는 기쁨이 있을까요?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고 살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으로도 하늘로도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매일 매일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자연의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을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가장 따뜻하고 가장 와닿게 말씀하려고 최선을 다하십니다. 하지만, 이 자연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다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에서 5분간의 스케이팅을 연출하기 위해 얼마나 연습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들여서 노력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시간들이 모여 단 '5분'에 집중되어 표현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준비하시고 수많은 노력과 사랑의 모든 마음을 쓸어담아 이 땅에 보내주신 당신의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강물처럼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로 흐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주셨음에도 자랑하지 않으셨고 무례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으셨으며 성내지 않으셨고 오래참으셨고 모든것을 바라고 모든것을 믿어주셨습니다. 이 모든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6)

 

예수님이 하나님으로하여금 우리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구원하시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당신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1:4)

 

묵상: 범죄한 인류에 대한 구원보다.. 예수님의 죽음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 지금까지는 구원이 먼저고 예수님의 죽음이 먼저인줄 알았지만... 가장 먼저 있었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일이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0:17)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 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땅에 내어주실때 마음의 투쟁이 없지 않으셨습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토록 놀랍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이해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살면서 더욱 많이 더욱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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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죄의 시작

성경/말씀 묵상|2020. 8. 9. 15:45

하늘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셨고 아버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셨던 예수님(천사장:미가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지위의 천사가 곧 루시퍼, 루스벨이었습니다.

 

루스벨은 하나님 아들의 권위를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에게 하나님을 오해하게 했고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그의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그를 돌이키려고 했으나 끝내는 그도 하나님께서 옳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멸망한 천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가 반역을 일으켰을때 곧장 그를 멸하지 않으셨을까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말이 엄청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분의 속성에는 '폭력'과 '제거'와 같은 성질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나는 루스벨이 얼마나 악한 마음을 품었었는지 하늘의 천사들이 다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루스벨의 반역의 결과가 다 드러나기 전에 그를 제거했으면 천사들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더 깊어졌을 것이고 루스벨이 얼마나 악한 마음을 품었는지 모두가 완전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물이었던 루스벨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사랑하셨기에 그를 기다려주시고 그를 멸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용납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루스벨을 오래 참으셨습니다. 

 

루스벨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지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품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루시퍼와 같은 우리의 품성을 오래 참고 계시고 우리를 돌이키기 위해서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을 활용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당연스럽게 생각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시험은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루스벨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나보다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보이십니까? 나보다 더 존경을 받는 어떤 위치의 사람이 보이십니까?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분명 당신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 사람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각자 위치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중이 있지 않습니다.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더라도 우리 스스로 질투와 시기심을 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을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여 회개의 선물을 받아야겠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어떤 사람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을 버리지 않는다면...(회개의 선물을 구하지 않아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곧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걸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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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사랑해야 하나요?

성경/말씀 묵상|2020. 8. 4. 23:25

한 친구가 자신을 비판하고 힘들게하는 친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물어봤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런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에서 배제 했다고 하면서 지금 큰 기로에 놓여있다고 하네요..

 

일단, 먼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함께 대화했습니다.

 

영희야, 우선...영희도 선생님도 정답을 알고 있잖아. 근데..사실 선생님이 영희에게 해줄 말들을 생각해봤는데.. 선생님 역시도 사랑이 없고 영희와 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하고 있어 어쩌면 더 심하게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야..

 

그래서 그런 나를 돌아보게 됐고 선생님을 힘들게 했던 사람에게서 아직까지 마음이 힘들고 지금도 시험이 되는 친구들도 조금 있어. 그래서 선생님도 사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 ^^

 

우선, 가장 먼저 사랑에 대해서 들었을 때 생각난 성경구절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이야.

 

사도바울이 말씀했는데, 사랑장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는 12장을 살펴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간의 문제가 있었나봐. 그 문제는 바로 은사들의 높고 낮음에 대한 부분이었던 듯 해. 사도바울이 이제 뭐라고 하냐면 예언을 하는 은사, 방언을 하는 은사, 믿음의 은사, 헌신의 은사등이 있다. 그런데, 그 은사들은 모두 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고 말하고 있어. 여기서 알 수 있는게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이야.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제 12장을 마치면서 31절에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하면서 바로 사랑장이 나와. , 은사 중에 제일 큰큰 은사가 사랑이라는 의미야.

 

그런데, ‘은사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중에 최고의 선물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이잖아.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사랑은 ?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방언의 능력이 있어? 사랑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을 해.

 

그래서 사랑이 밑바탕에 없는 은사는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어.

 

사도바울은 그러면서 134절에 사랑은이라고 하면서 사랑의 속성들을 말해줘. 그런데, 여기서 사랑은은 한글번역이고 원어로 보면 헤 아가페라고 한데. 그 구절을 해석하면 는 영어의 정관사 the와 같은 단어고 아가페는 영희도 알 듯이 사랑이라는 의미야. 그래서 고린도전서 134절의 사랑은그 사랑은이 되고 여기서 말하는 그 사랑은이라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의미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 사랑 딱 한가지래.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를 힘들게하는 사람이나 비판하는 사람이나 좋아해주는 사람이나 상관없이 모두를 사랑해야 하는 듯 해.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않았고 당신에게 침을 뱉고 때리고 나사렛 출신이라 무시하고 처녀에게서 나온 자식이라고 눈빛으로 경멸하고 가난하다고 멸시했던 그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고 친절하게 대하셨고 사랑하셨잖아 :)

 

그런데, 만약에, 선생님이 하는것처럼 나를 미워 하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에서 빼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거같야. 왜냐하면, 이 세상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그래서 정리를 하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에게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랑을 달라고 간절히 바라고 구하고 사모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으므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야 한다. 매일 매일 하나님께 말씀으로 기도로 나아가서 그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사랑장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랑의 속성은 오래 참음인데, 이 오래참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적혔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이 오래참음은 속에서 격정적인 감정이 흘러 나왔을 때 그걸 참는걸 뜻한데.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건네고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것도 사랑이겠지만 이렇게 오래참는것도 사랑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을 했는데..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였다고 말을 했어. 그렇게 보면 영희는 그 친구가 비판을 했을 때 함께 비판하지 않고 인내했다는 부분에서 그 친구에게 사랑을 베푼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드네.

 

<저를 힘들게 했던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나 여기선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들려주시더라고.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써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것으로 삼은 여부를 증거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부모님하고 갈등이 너무 심해서 19살때인가 집을 나갔었어. 부모님 마음에 대못을 박은거지.. 그게 잘못이라는걸 알면서도 나갔었어. 그로부터 1년뒤에 집에 돌아왔고 시간이 지나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내가 부모님께 그렇게 큰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은 나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해주시고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 그걸 경험하니까 용서가 안되는게 없었어 당시에는.

 

그런데, 지금은 선생님도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서 용서의 은혜에 참여하고 있지 않나봐’ ..

 

같이 그 은혜에 참여하자 영희야!!

 

지난번에 선생님을 힘들게하는 친구들로 인한 글을 보내준 기억이 있는데.. 그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도 큰 시험이 되더라고. 여자친구는 곁에서 지켜보는 입장이니까 그런 친구들은 만나지 않는게 좋다고 했는데... 가야할거 같더라구. 그래서 기도를 정말 많이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기도하고 차를 마시면서도 기도했는데 나중에 집에 돌아오는길에 정말 정말 행복하고 감사하더라. 그친구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했을까... 기도를 이렇게 순간순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말야.

 

영희에게도 하나님께서 그 친구를 사용하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생각하게 하시고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시는 듯 해. 그렇지만, 하나님은 영희가 가장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분이니까 인간적으로 너무 힘이 들면 지혜롭게 잘 조절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 은혜로 또 친구에게 지금처럼 사랑도 전해주고 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 ^^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에 비하면 자식들이 우리에게 구하는 것은 무색해진다. 아무리 씨름하고 지칠지라도 우린느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고 내게 인내하시며 내가 자식들에게 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내 약점을 참아주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기 의의자리에 이르러서는 절대 안된다. 우리가 자식을 인내하는 것보다 그분은 몇배나 더 오래 우리를 인내하신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써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것으로 삼은 여부를 증거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피차에 대하는 방법으로 그대를 대하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때때로 피차간에 취급하는 것처럼 우리를 취급하신다면 우리는 소실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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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의 어린 시절

성경/말씀 묵상|2020. 7. 18. 20:26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이야기들 모두가 다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 이야기를 앞으로 시간이 되는대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의 소년들은 어렸을 때부터 랍비들이 만든 규칙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지도 아래 랍비의 규칙 아래 있지 않고 자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진짜 교사는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 늘 구약성경을 연구했고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라는 말씀이 늘 그분의 입술에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대로 온순하고 유순한 태도로 호감을 주기 위해 힘쓰셨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부모님을 사랑하셨지만, 그 어린 시절에도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집안 형편은 무척이나 가난했기에 그분의 어린 시절은 침묵과 끈기 그리고 인내의 공과를 배우기에 적절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에게는 마리에게서 난 아들 말고 다른 아들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곧 예수님의 형제들이었는데 그들은 랍비의 교육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따랐기에 예수님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순종하는 삶'을 완고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자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접촉하고 계셨지만, 형제들은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없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형제들 때문에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으셨지만 그 형제들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친절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계신 가정은 좀 더 순결한 분위기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왜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들을 그런데도 사랑해야 하는가? 에 대한 물음을 예수님의 삶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정에서만 순결한 분위기를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셨기에 줄 돈이 거의 없으셨지만 자신보다 더 궁핍해 보이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의 음식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 거칠게 말할 때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고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냉수를 쥐여 주고 음식을 쥐여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표준은 형제들의 삶의 표준이 아니었고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삶의 표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매 순간이 영원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아셨고 순간을 보배처럼 여기시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 자연 속에 있을때 가장 행복하셨습니다. 기회가 있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들판이나 골짜기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통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하셨고 무척이나 가난한 삶을 사셨고 쉼을 얻어야 하는 가정에서는 형제들로 인한 심적 편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려운 삶을 살기에 가난한 삶을 살기에 형제가 나에게 막 대하기에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절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고 그런데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우리에게 모본으로 남겨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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