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장] 예수님의 심리치료, 안식일의 의미, 세리 계급

성경/마가복음|2024. 7. 2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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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가복음 2장의 성경구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마가복음 2장 1-12절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 요약: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분의 행동과 말이 사랑이었고 또 예수님께서 많은 귀신들린자들, 환자들을 치료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그날도 어떤 집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던듯 합니다. 이 모습은 이미 마가복음 1장 33절에서도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는 구절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있던 한 집에 갑자기 지붕이 열리고 어떤 병상이 내려옵니다. 한 중풍병자가 병상에 누워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4명이 중풍병자를 무리가 많아 예수님께 데려 갈 수 없음을 알고 지붕을 뚫고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의 발 아래 내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논쟁'이 생깁니다. 바리새인들이 '저 사람이 누구관대 죄를 사한다고 말하는가?'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시고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갑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놀랍니다.
  • 지붕을 뚫을 수 있었을까? 당시 이스라엘의 주택은 아래 사진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붕이 평평했다고 하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 사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무리를 헤집고 몇번이고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절망했습니다. 나의 치료자 예수님께서 바로 앞에 계신데... 조금만 나아가면 만나뵐 수 있는데...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 중풍병자는 친구들에게 요청을 합니다. 나를 지붕으로 데려가서 내려주라! 친구들도 이 믿음의 요청에 응답했고 지붕에 힘들게 올라갔고 지붕을 뚫고 환자인 친구를 내려줬습니다. 그렇기에 이 구절에서는 "저희의 믿음, 그들의 믿음"이라고 표현됐습니다.
  • 마가복음 2장 5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겠지만 선천적 환자와 후천적 환자가 있는데 중풍병자는 후천적 환자였습니다. 곧 그 자신의 죄악된 생활의 결과로 중풍 병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죄에 대한 후회를 거듭거듭 했고 그 후회에 의해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육체적으로 불편한 것보다 마음으로 죄에 대해 괴로워함이 더욱 컸기에 그의 심중의 무거운 심적질병이자 영적질병의 치유를 먼저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 마가복음 2장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 예수님께서는 이 환자에게 먼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고 서기관들에게 2장 9절의 말씀을 하신 후, 중풍병자에게 다시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것을 먼저(죄사함) 하고 그다음 쉬운 것(일어나 걸어가라)은 자동적으로 하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꼐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을 때 이 환자의 마음에는 용서의 평강이 임했고 하늘의 빛이 그의 얼굴에 빛났습니다. 죄로인한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자 육체적 고통이 사라지고 온몸이 변화된 것을 느꼈습니다. 죄인이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는 어린아이같은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환자는 더이상 아무 요청도 하지 않았고 행복해하며 누워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치유 뒤에 육체적인 치유가 있었습니다.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죄악된 결과로 육체적 질병을 얻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에는 죄의 불안과 죄에 대한 후회로 채워지지 않는 무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병을 치료자이신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가장 큰 것을 먼저 치료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 중 누군가가 마음의 병이 있거나 육체적 질병에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의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병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번뇌했던 시간들이 쌓여 얼굴에 수심이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사람들의 좋지 않은 시선을 경험하고 그것이 마음에 상처가 돼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주님은 그 모습을 어떻게 하시는 분이십니까? 가장 먼저 마음을 치료해주시고 어루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괜찮다.. 다 나앗다. 내가 있다"
  •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 - 마가복음 2장 1-12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들에게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할 수 있고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13-22 <세리 마태, 금식 논쟁>

  • 요약: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레위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레위 마태는 잔치를 엽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곳에 제자들과 함께 참여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세리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님께서 이에대해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레위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전해지는데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그가 딱 하나 갖고 간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세금 장부를 기록했을 때 썼던 '펜' 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그 펜으로 마태복음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 시대상으로 바라보는 '세리 계급' - 당시의 유대인들에 내려지는 격언 중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세리가 집에 들어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해진다 <Misahnah의 정결과 부정에 관한 Tohoroth> 이렇듯, 세리계급은 당시에 엄청나게 멸시 받는 계급이었습니다. 더 생각해보면, 세리 직업의 사람들은 당시 자국인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박 아래 있었을 때 자국민들의 세금을 걷어 로마정부에 갖다 바쳤던 로마 소속 공무원이었기에 우리나라로 치자면, 친일파였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세리들과 함께 식사했을까요?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서기관, 바리새인들보다 세리와 다른 공공연한 죄인들이 더 희망이 있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숨기지 않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영과 혼과 몸을 더럽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었기에 천국에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병적 상태를 깨닫고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6:3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에게 가서 고침을 받으려고 노력합니다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예수님은 자신이 부요하다고 하는 자들, 자신이 건강하다고 하는 자들이 아닌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7)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막2:23-28>

  • 요약: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격노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 믈라코트: 당시 유대인들은 '믈라코트'라는 규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 행동강령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믈라코트는 율법주의의 상징입니다. 이 규례에 있었던 것이 바로 '안식일에 벼 이삭을 자르는 일을 금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 다윗이 진설병을 먹음 -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던 이 사건은 삼상 21:1-6절에 나와있습니다. 사울왕에게 쫓기고 있던 다윗이 방랑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놉당에서 배가 고팠던 다윗이 제사장에게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어봅니다. 레위기 법에 의하면 안식일이되면 일주일간 근무했던 제사장이 서로 교대하면서 12덩이의 떡 덩이들을 교환하고 제사장들만 먹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날이 정확하게 안식일이라고 확인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떡은 대게 안식일에 교환을 하는데 교환을 하고 시간이 지났으면 분명, 제사장들이 다 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취해지지 않은 떡을 보면 그날이 안식일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렇게 먹었는데 하물며, 안식일을 제정하신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하는 말씀입니다. 
  • 안식일: 구약의 안식일은 예배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안식일 개혁에 관한 내용입니다. 신약에 나타난 안식일은 '영혼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살리는 날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안식일, 예수님과 함께하는 안식일은 '예배를 회복함과 동시에 사람을 살리는 날'로서 그 의미를 어떻게 복음적으로 구현해내야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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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1장 "나를 따라 오라" (메시야 비밀)

성경/마가복음|2024. 7. 1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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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1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어부가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7).

오늘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그분의 사역의 원천이 기도임을 느끼며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기도의 삶을 살고자 말씀을 폈습니다.

1. 12제자의 공식적인 출범- 마가복음 1장 16-20

어부들을 부르심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각 2명의 어부를 따로 부르는 내용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엄청 좋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마가는 요한과 야고보를 그들의 아버지 ‘세베데’, 그리고 삯꾼들과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요한과 야고보가 시몬과 안드레보다 더 좋은 형편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가가 이 두명의 각기 다른사람의 형편이 한쪽은 가난하고 한쪽은 더 형편이 좋았다 라고 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경제적 여건이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삼으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다고 보시면됩니다.
  • 그리고 함께 이 성경절을 읽었는데 이 4명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이 어떻습니까? ‘과정이 생략’ 돼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단순하고 직접적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보면 이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행동이 약간은 우발적이거나 현실적으로 어려워 도피하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네. 이해를 돕기 위해 요한복음 1장 35, 40절을 살펴보겠습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사람과 함께 섰다가

(생략)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 이들(베드로의 형 안드레, 사도 요한)은 침례요한의 회개에 대한 기별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침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기전에 예수님에 대해 알았고 침례요한의 기별을 통해 마음을 준비했던 듯 합니다.
  •  그래서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우발적으로 따른 것은 아닌듯 합니다. 베드로 역시도 안드레가 예수님에 대한 소개를 했을 때 직접 그분을 뵙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마가복음에서는 즉시, 곧 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며 직접적이고 간결하게 사건을 서술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그래도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불러주셨을 때 그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즉시로 예수님께로 갔음을 말해줍니다. 마가는 요한과 야고보가 아버지를 두고 간것을 ‘버려두고’라고 표현할 정도로 예수님을 즉각 따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 말하는 “나를 따라오라”는 부르심은 ‘전임제자 (full-time)’로의 부르심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제 예수의 학교에서 배우고 전도하고 이후에 교회를 설립하는 가르침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12제자처럼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 또는 평신도 목회자일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가 출범하는 상황에서 12제자의 헌신과 봉사는 절실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28절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눅 4:31-37)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 이 당시에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심에 권세가 있고 서기관들과 같은 형싱적인 설교와 가르침이 아니었기에 군중들이 놀랐습니다. 
  •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존재를 말해줍니다. 이 귀신들린자의 역할은 악과 선을 드러내주는 역할,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줍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마가복음에서 등장하는 신학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메시야 비밀'입니다. 메시야 비밀이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와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이 로마에 의한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존재로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 사역이 어려움을 겪게 되실 것을 피하시고자 이 자에게 '잠잠하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 - 기도 (막1장 35-39절)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자들, 귀신 들린 자들 그리고 소문이 퍼지면서 온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앞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피곤하셨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새벽 미명에 무엇을 하러 가셨습니까? ‘기도’를 하러 가셨습니다.
  • ‘미명’이라는 단어는 아닐 미자, 밝을 명자를 써서 아직 밝지 않은 때 즉, 새벽을 의미합니다. 찾아보니까 유대인의 관념으로는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였다고 합니다. 이 이른 시간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러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일상에서 늘 기도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던 예수님 (눅 6장 12절)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 이 구절은 이제 공식적으로 12제자를 임명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앞에 기도하셨던 구절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까 사역을 하셨을 때처럼 일상에서도 기도하셨고 하나님 사역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 기도하셨습니다.  이 구절에 예수님께서는얼마나 기도하셨다고 나오나요? 네 맞습니다. 밤이 새도록. 여기서 사용된 ‘밤이 맞도록’에 해당하는 단어가 의학적으로 쓰일 때는 밤새 병간호를 한다는 표현을 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 읽었던 마가복음 구절과 지금 누가복음 구절에서 조금 다른점이 있는 것 같아요. 아까 읽었던 마가복음 구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러 가셨다고 나왔는데 지금은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럼 종합해보면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 우리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 하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쩌면 매일 기도시간을 정하고 기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때 겪게 되는 문제가 기도가 자칫 형식적이게 되거나 마음없이 기도드리게 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일입니다. 분명, 계획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틀에 갖춰서 기도하지 말고 장소를 바꾸거나 기도시간을 늘여보거나 하는 등의 노력도 필요할 듯 합니다.
  • 저도 아침에 기도를 매일 같이 드렸던 적이 있는데 시간을 정해두고 해서 나의 삶이 돼서 좋았는데 그안에서 더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기도하지 못해서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기도하는 장소를 바꿔보기도 했습니다. 집에서만 기도하다가 잘 안될 때는 산으로도 가보고 산책을 가보기도 하고 그러니까 확실히 좋긴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걸려서 그렇지.
  •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일상이나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나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기도와 실제 행동을 일치 시키기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은 애절하고 절박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홀로 천연계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일하던 곳에서 떠나서 들로 가시고 푸른 골짜기로 가서 명상하고 또는 산비탈이나 삼림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셨다. 이른 아침에 그는 흔히 외따른 곳에서 성경을 상고하거나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신 분이셨는데 기도하실 때 어떤 분이셨다고 나오나요? '그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대면하고 기도하고 대화하실 때 가장 행복해했던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으로 행복하십니까? 우리가 삶에서 조금씩 조금씩 기도로써 예수의 모본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시간이 행복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아래도 제가 좋아하는 내용의 책인데 한번 보시죠!

구주께서 신적 능력을 소 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필요를 느꼈다면, 연약 하고죽을수밖에없는죄인인우리는얼마나더열렬 하고 끊임없는 기도의 필요를 절실히 느껴야 할 것인가! ...그분은 금식하셨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열렬 한 기도와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굴복함으로 승리자가 되셨다. 마지막 시대에 진리를 믿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기도의 위 대한 모본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의 실천과 치유의 생애셨습니다. 위에 나온 성경구절들에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결코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에 그분의 능력의 원천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예수, 우리도 그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기도가 부족한 모습을 많이 봅니다.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조엘 비키라는 사람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의 기도생활을 연구한 후 "오늘날 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이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 루터는 매일 3시간씩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성경연구를 하기 가장 좋은 시간에 오히려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래 기사에서 내용이 좋아 인용했습니다!

루터의 친구인 바이트 디트리히 “한 번은 나는 그가 기도드리는 것을 볼 기회를 가졌다. 기도 속에서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얼마나 영과 믿음을 다해서 기도드리는지! 그는 하나님께 어울리는 최고의 경외심으로 기도했고 마치 아버지나 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망과 믿음으로 기도했다. 그가 하나님과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의 영혼에 뜨거운 열정의 불이 붙었다.”
 

전설적 기도생활 실천한 루터 매일 3시간, 규칙적 기도 - 아이굿뉴스

기도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조엘 비키(Joel R. Beeke. 1952~)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의 기도생활을 연구한 후에 오늘날 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바로 이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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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모두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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