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1장, 2장, 9장] 이방문화에서의 선교, 부림절

성경|2023. 12. 24. 00:36

이방문화에서의 다니엘과 세친구

 

유대인들은 신앙의 원칙을 지키기가 쉬웠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세한 신앙의 원칙들이 그 나라의 법으로 제정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생각을 해보면 만약 안식일이 국가에서 지켜야할 신앙의 원칙으로써 법으로 제장돼 있었다면 직장을 두고 씨름하거나 시험을 두고 고민하지 않아도 됐을듯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법으로 정해져 있었더라도 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도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경고이 기별을 보내시고 다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서해주시는 이야기의 반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를두고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뿐이라 (사 29:13)

'내게서 마음이 떠났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입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일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근거리에 두는 일인 듯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죄와 파멸이 반드시 뒤따랐습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는 나라가 점령당해 다른 나라에 끌려가 살게 됐습니다. 어찌보면 이스라엘에서 신앙을 지키던 것보다 덜 지켜도 혹은 안지켜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대로 다니엘은 뜻을 정해 자기의 몸을 더럽히길 원치 않아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았습니다. 또 세 친구는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으며 다니엘은 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 금지된 환경에서도 하루 3번 기도했습니다.

 

이 예화들은 이방의 문화속에서도 마음의 내면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말씀에 충실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신앙이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계속 향하도록 사람의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이방문화속에서 살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신실하게 보여줬던 사람으로 '요셉'도 있습니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보는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어찌 하나님앞에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하며 코람데오의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책에는 그가 성적으로 타락한 애굽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의 주위에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숱한 죄악들이 둘러 있었으나 요셉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생애하였다. 그의 생각은 금지된 문제들의 주변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애굽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욕망으로 자기의 원칙을 감추는 일도 없었다. 그가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요셉은 마음으로 항상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방 문화 가운데서도 신실함을 잘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방문화에서의 에스더-모르드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이후, 메대 페르시아라는 국가가 세워졌고 유대인들은 고향 땅으로 귀향했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여전히 이방 땅에 남아있었습니다. 그 중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살고 있었고 모르드개라는 사람은 왕실 관리로 일을했습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사촌이자 입양했던 수양 딸이었다고 합니다.

에스더 1장에 보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했던 왕은 아하수에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이 왕비블 탐탁치 않아합니다. 왕비는 와스디라는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왕의 총애를 잃어버렸고 왕은 이에 종들을 전국 각도에 보내 왕비를 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에스더도 왕궁으로 오게 됐습니다.

네. 에스더가 왕궁으로 왔고 궁녀를 관리하는 헤개라는 사람에게 선택을 받았는데 이후에도 자신이 유대인임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아무래도 종족과 민족을 바로 고했다면 페르시아의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에의해 적대적인 환경에 노출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침묵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Q. 신앙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떄는 어떤 경우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신앙인으로서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까요?

에스더 당시 페르시아의 왕은 아까 말씀드린대로 아하수에로 왕이었습니다. 에스더 3장에보면 이 아하수에로왕이 '하만'이라는 사람에게 큰 권력을 주게 됩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하만 앞에 나와 무릎꿇고 절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던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만'이라는 인물이 출애굽 이래 적이었던 '아말렉 사람'이었던 '아각'의 후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은 당연히 죄인인 인간을 당연히 숭배하지 않았겠지요.

 

마치, 다니엘의 세친구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아 풀무불에 던져졌던 것처럼 모르드개에게도 큰 시련이 닥칩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는 자신들에게만 임한 시련었는데 모르드개에게는 모든 유대인의 사활이 걸린 시험이 닥치게 됐습니다. 곧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반포됐습니다.

이제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있고 모르드개는 옷을 찢으며 슬퍼합니다. 이 시기에 에스더는 아하수에로왕의 왕비가 됐습니다. 모르드개는 이제 에스더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네가 왕후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누가 그걸 알겠느냐고 말합니다. 이에, 당시 페르시아법으로는 사전에 왕에게 말하지 않고 왕앞에 나아가면 죽는 법이 있었음에도 에스더는 "온 유대인에게 나를 위해 3일간 금식하고 기도해줄것을 구했고 자기도 3일간 기도 후에 왕앞에 나아갈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섭리로 제비 뽑기로(부르) 온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던 하만이 도리어 죽게 됐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이날을 부림절로 기념하고 있다. 여기서 '부림'은 히브리어 푸림인데, '푸림'이라는 단어는 '제비뽑다'는 의미인 '푸르'의 복수어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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