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장] 하나님은 왜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은사를 주지 않으셨을까?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말을 잘하지 못할까?”
누군가는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잘 전한다.
누군가는 찬양을 잘하고, 누군가는 사람들을 잘 이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변 사람을 잘 챙긴다. 아픈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교회에서 특별히 잘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은사와 나 자신을 비교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저 사람만큼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는 걸까?”
그런데 고린도전서 12장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사를 주지 않으신 것은 누군가는 중요하고 누군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몸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한 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을 시작하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린도전서 12:4-6)
이 말씀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있다.
바로 “여러 가지”다.
은사는 여러 가지다.
직분도 여러 가지다.
사역도 여러 가지다.
누군가는 지혜의 말씀을 받고, 누군가는 지식의 말씀을 받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이 주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침의 은사, 능력을 행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영을 분별하는 은사, 방언과 통역의 은사가 주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능력을 주시지 않으셨을까?
바울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사의 목적이다.
은사는 나를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 보이기 위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은사는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은사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그의 뜻대로”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저 은사가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왜 저 사람처럼 하지 못할까?”
하지만 바울은 은사를 비교의 대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은사를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고 말한다.
어떤 은사는 많은 사람 앞에서 쉽게 드러난다.
하지만 어떤 은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나타난다.
누군가는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누군가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교회를 위해 준비하고 섬긴다.
누군가는 말씀을 잘 가르치고, 누군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우리는 눈에 잘 보이는 은사만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시다.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아요”
바울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아주 익숙한 비유를 사용한다.
바로 몸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지만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다.
눈도 있고, 귀도 있다.
손도 있고, 발도 있다.
그런데 만약 발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하지 않은 것 같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발은 손이 아니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귀는 눈이 아니기 때문에 몸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몸이 움직일 수 있다.
만약 온몸이 눈이라면 어떻게 될까?
볼 수는 있겠지만 들을 수는 없다.
온몸이 귀라면 들을 수는 있지만 걸을 수는 없다.
모든 지체가 똑같다면 그것은 건강한 몸이 될 수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설교자가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찬양 인도자가 될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이 앞에 서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맡기셨다.
문제는 은사가 아니라 비교에서 시작된다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분열이었다.
누군가는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말했다.
결국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지도자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누가 더 훌륭한가?
누구의 가르침이 더 좋은가?
누구를 따라야 하는가?
이런 분열은 고린도 교회에서만 있었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누가 더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툼이 있었다.
초대교회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지도자와 역할을 중심으로 나뉘었다.
문제는 항상 비슷했다.
“누가 더 높으냐?”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바울은 씨를 심었다.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중요한가?
바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둘 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일꾼일 뿐이다.
심는 사람이 필요하다.
물을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하지만 씨를 실제로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이 말씀은 누군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역할이 하나님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를 원하시는 대로 두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고린도전서 12:18)
이 말씀은 비교에 지친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며 자꾸 생각한다.
“왜 나는 저 사람처럼 할 수 없을까?”
하지만 어쩌면 질문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이 자리에 두셨을까?”
손이 발이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귀가 눈이 되려고 비교할 필요도 없다.
각 지체는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으로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더 중요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놀라운 말을 한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
하지만 교회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조용히 준비한다.
누군가는 처음 온 사람에게 먼저 다가간다.
누군가는 아픈 성도에게 연락한다.
누군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매주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봉사한다.
어쩌면 교회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실제로는 가장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체가 서로를 필요로 하도록 만드셨다.
눈은 손에게 말할 수 없다.
“나는 너를 쓸 데가 없다.”
머리도 발에게 말할 수 없다.
“나는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지체가 아프면 모든 지체가 함께 아파야 한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은 교회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의 의미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성공과 기쁨을 질투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같은 몸에 속한 지체이기 때문이다.
내 몸의 한 부분이 아프면 몸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한 사람이 아파하면 우리는 함께 돌아봐야 한다.
한 사람이 기쁨을 얻으면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경쟁이 아니라 연결.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부터 성령의 역사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말한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익숙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결코 가벼운 고백이 아니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자신의 삶의 궁극적인 주인이 누구인지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위험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는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놀라운 은사를 나열하기 전에 먼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이야기한다.
결국 성령의 은사의 출발점은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높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은사는 무엇일까?
우리는 은사라고 하면 특별한 능력만 떠올릴 때가 있다.
방언.
예언.
병 고침.
하지만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령의 은사는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르치는 사람도 필요하다.
서로 돕는 사람도 필요하다.
다스리는 사람도 필요하다.
믿음으로 공동체를 붙드는 사람도 필요하다.
누군가를 따뜻하게 돌보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을까?”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누구를 위해 사용할 수 있을까?”
은사를 발견하는 목적은 나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은사를 통해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다.
바울과 아볼로, 누가 더 중요한가?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아볼로를 비교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경쟁자로 보지 않았다.
한 사람은 심었다.
다른 사람은 물을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 강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미 시작된 일을 잘 성장시킬 수 있다.
누군가는 말씀을 깊이 연구할 수 있다.
누군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돌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능력은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했을까?
고린도전서 12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이 시작된다.
우리는 흔히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른다.
이 연결이 굉장히 중요하다.
바울은 은사를 이야기한 뒤 사랑을 이야기한다.
왜일까?
아무리 뛰어난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그 은사는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놀라운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슨 은사를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다.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다.
그리고 은사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왜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은사를 주지 않으셨을까?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은사를 주지 않으셨을까?
아마도 모든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만드셨다.
나는 누군가가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서로 다른 은사는 우리를 나누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서로 연결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누가 더 뛰어난가?”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주신 것으로 어떻게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갈 수 있을까?”
고린도전서 12장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정리하면 고린도전서 12장은 이렇게 말한다.
1.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한 분이시다.
서로 다른 은사가 있다고 해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다.
모든 은사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다.
2. 은사는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러워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3. 모든 지체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몸에 속해 있다.
손과 발, 눈과 귀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듯 교회 안에서도 모든 사람의 역할은 다르다.
4.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도 반드시 필요하다.
눈에 띄지 않는 봉사와 섬김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사용하신다.
5. 한 지체의 고통과 기쁨은 모든 지체의 고통과 기쁨이다.
교회는 경쟁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돌보는 공동체다.
6.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이다.
아무리 큰 은사가 있어도 사랑 없이 사용된다면 그 은사의 목적을 잃어버릴 수 있다.
마무리|나는 무엇을 받았는가보다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고린도전서 12장을 읽으며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다.
“나는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을까?”
하지만 바울의 메시지를 따라가 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나는 누구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과 똑같을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 앞에 서야 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처럼 말해야 하고, 누군가처럼 봉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다르게 만드셨고,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셨다.
그리고 그 모든 은사는 결국 하나의 목적을 향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은사를 찾는 것보다 먼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돌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해 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봉사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통해 오늘 누군가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린도전서 12장의 마지막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다음 장으로 이끈다.
은사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그 은사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다.
사랑이다.
함께 나눌 질문
Q. 내가 직장이나 교회에서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봉사는 무엇인가요?
Q.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은사나 장점은 무엇인가요?
Q. 나는 다른 사람의 은사를 보며 비교하고 있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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